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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극을 보면서(2)  역사 이야기 1

 

시대극에 재미를 느끼다 보니, 주인공의 신분이 뭔지 정확하게 알고 싶어졌다. 그러다 보니 그런 신분이 주어진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7)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에도 시대를 열은 토쿠가와이에야스는 어떤 사람인지, 그 가문은 어떠했는지, 쇼군(將軍)이 뭔지, 무사(武士)가 뭔지... 이런 식으로 거슬러 따라 올라가다 보니 용어들이 좀 생소한, 개략적인 역사 정리가 되고 말았다.
아니, 일부 역사의 해설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원래, 古代 일본이라는 나라는, "天皇과 朝廷 "이 현재 지도에서 보이는 네 부분의 섬을 확실하게 다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古代時代(3세기-12세기)인 大和, 飛鳥, 奈良, 平安時代의 주요 지배 지역은 현재의 긴키지방(近畿, 오사카시, 교토시, 나라시와 그 주변)에 불과하다. 이 좁은 땅에서 하나의 나라로 그 틀을 세워가면서, 천황家와 귀족(대부분 公職을 가진 文士)들은 자신들의 농지와 농민을 소유하였고, 땅(農地)에서 걷어들이는 경제력을 기반으로 서로간에 세력 싸움을 벌이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멀리 각 지방에는 조금씩 땅을 개척하여 살아가는 농민들이 있었다.

그러다 아스카 시대(飛鳥593-710) 645년, 당시까지 큰 세력을 부리고 있던 귀족 집안을 천황가에서 물리치고 大化改新을 하였다.
이후 율령국가의 기본인 公地公民의 제도를 시행하여 땅과 백성들이 모두 朝廷(國)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班田收授法을 만들면서, 백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호적정리를 하였다. 그리고는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에게 땅을 빌려주어 농사를 짓게 하여 세금을 거두고, 그 당사자의 死後에는 다시 나라에서 회수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렇게 하면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생산량이 늘어나리라고 생각했지만, 농민은 영원히 자기 땅을 가지지 못하면서 힘에 부치는 세금, 부역, 징병을 당하여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살던 곳에서 도망을 가기도 했고,  다시 有力 귀족이나 절 , 사원에 소속되어 연명하게 되었다.

결국 율령국가의 근본이 되는 公地와 세금이 늘어나지 않아 지배력의 위기 상황이 되니,
이번에는 나라시대(奈良710-794)  723년 三世一身法을 만들어, 새롭게 땅을 개척한 농민은 3대까지 그 땅에서 먹고 살게 해 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영원한 것이 아니니 여전히 땅 개척은 게을리 되고 조정에 들어오는 세금은 별로 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743년 墾田永年私財法을 만들어 개척한 땅을 영원히 개인이 소유하는 것을 인정하는 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멀리 있는 땅을, 돈을 들여 水路까지 만들어가면서 개척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농민이 아닌 寺院, 神社, 귀족, 지방의 호족들이었다. 이들이 앞을 다투어서 땅을 늘려가고 그 주위에 사는 농민이나 떠돌이 등을 고용하여 커다란 領地(개인 농장)를 만드니,
이를 "장원(莊園)"이라 불렀다.

결국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장원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써 公地公民의 제도는 무너졌으며,
이 제도를 유지하며 지배력을 키우려고 하던 천황가의 세력도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헤이안 시대(平安794-1192)의 중반, 귀족 중 후지와라(藤原) 일족이 정치 세력을 잡으면서, 예전부터 寺院이나 神社에서는 땅을 소유해도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후유소노켄(不輪租の權)이라는 특권이 있었는데, 이를 자신들의 영지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유력한 귀족의 편법을 알게 된 지방 호족들은, 자진해서 이들에게 명목상 자신의 장원을 기증하여 소유권자가 귀족이 되게 하니,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귀족에게 명의를 빌려 준 것에 대한 禮로 바치는 것은 있었으나, 그 양이 세금보다 적어 부담이 덜 했다.

또한 명의상 유력 귀족의 땅이 되었기에 후뉴노켄(不入の權)이라는 권리도 생겨서, 朝廷에서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내려보내는, 코쿠시(國司, 현재의 縣知事)라는 관리와 그의 부하들이 자신의 영지에 들어와 횡포를 부리는 것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有力 귀족들이 점점 거대 장원을 소유하게 되면서 나라에 내는 세금이 줄어들게 되니, 天皇家에서도 결국엔 전체 나라 땅에 대한 지배력을 잃은 셈이 되었다. 자신들도 먹고 살기 위해 영지를 마련하고, 천황가로 대접은 받지만 실질적으로는 귀족들의 힘에 끌려다니는 형편이 된 것이다.

*** 참고 ***
일본의 지방 구분
고대 일본은 60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律令制를 바탕으로 법을 만들고자 하였고, 701년 드디어 大寶律令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지방 행정 구획도 전부터 나뉘어있던 구분을 정리하여, 고키시치도(五畿七道)로 크게 나누고, 다시 쿠니(國)> 군(郡)> 리(里) 로 확립하였다. 쿠니를 다스리는 관리가 코쿠시(國司)이다.

우선 고키(五畿)는 "畿 근처의 다섯 쿠니"란 말이다. 畿는 首都를 의미하는 말로서, 긴키(近畿)지방의 近畿란 말도 수도에서 가까운 지방이란 말이 된다. 수도를 방위하는 군사적 성격이 강한 구분이다. 山城國, 大和國, 河內國, 和泉國, 攝津國이 포함된다.
(주로 일본의 옛 수도라고 알고 있는 교토는 794년부터 1869년까지 그 기능을 하였다)

시치도(七道)는, 東海道(15國), 東山道(8國), 北陸道(7國), 山陰道(8國), 山陽道(8國), 南海道(6國), 西海道(11國)이다.
중간 중간 國가 더 구분되어진 적도 있지만 대략 이렇게 1868년까지 유지하였다.
토카이도(東海道) 안에는 앞으로 역사상 많이 언급되는 쿠니(國)가 있는데, 오와리노쿠니(尾張國), 미카와노쿠니(三河國), 토오토미노쿠니(遠江國), 스루가노쿠니(駿河國)가 있다.

그리고 각 쿠니를 이름 중 한 字에 州를 붙여서 "무슨슈(무슨州)"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중국의 지방 단위를 본떠서 부르는 별칭이다.  
예로, 東山道의 한 쿠니인 시나노노쿠니(信濃國)를 현재까지도 신슈(信州)라 부르기도 한다.

좀 더 덧붙이자면,
토카이도란 명칭은 에도시대에 만든 주요 街道 중, 에도에서 교토까지 가는 한 街道를 칭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현재의 행정 지역명으로 이전의 國名이 사용되지는 않지만, 그 지역마다의 특산물이나 전통 문화에 붙여지고 있다. 그리고 JR철도 노선이나 역명에도 사용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예를 들어 백제였던 땅이 고려가 되고, 조선이 되면서 지배 세력이 새로운 왕조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국명이 남아있기가 힘든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은 힘이 있건 없건 일단은 천황제가 한 족보로 이어지는 나라였기 때문에 중간 중간 지배 세력은 바뀌어도 나라 전체의 틀이 뒤집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방 고유의 문화나 전통, 國名이 그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쿠니"란 말은 일본인 사이에 "出身地"란 뜻으로도 사용되어,
"오쿠니와도치라데스카(
お?はどちらですか, 고향이 어디입니까)"라고 한다. ******

 

한편, 코쿠시라는 관리는 대개 수많은 皇族들이 임명되었는데, 자신의 경제력을 키우기 위해 무리한 욕심을 부리니 부임해 간 곳에서 여러 마찰을 일으켰다. 코쿠시의 횡포를 주로 겪는, 귀족의 장원에 소속되지 않은 힘없는 호족이나 농민들은 자신들이 그나마 개척한 私有地를 지키기 위해 武裝을 하게 되었다.

동네 주민끼리, 친척끼리 모여서 조직화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조직간에도 힘을 겨뤄 主從관계가 생겨났다.

특히 무사 조직이 관동(關東, 교토에서 보아서 동쪽 지역)지방에 많이 생겼는데, 이는 朝廷이 있는 교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조정의 지배력이 강하지 못했으며, 새롭게 개척한 땅이 많다 보니 경계선이 확실하지 않아 농지 주인끼리의 싸움이 일어나기 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서로 무장을 하고 조직화한 것이다.

또한 무술에 능한 사람은 아예 직업적인 무사로 나서서 귀족의 장원에 소속되어 귀족 대신 싸움에 나섰다.

무사들의 조직이 많이 생겨나면서 그들 사이에서도 힘 겨루기를 하게 되고, 서로를 결속시켜줄 대표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대표자는 단순히 칼싸움을 잘 하기 때문에 뽑히기 보다는, 부하들에게 영역내에 있는 땅을 연공서열에 맞게 나누어 주고, 대대로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도록 지켜줄 수 있는 신뢰감 있는 사람이길 원했다.

이런 이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皇族으로 각 지방에 코쿠시(國司)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역시 임기가 끝나 교토로 돌아간다고 해도 수많은 황족중의 하나로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라리 지방 농민들 사이에서 황족이라는 높은 지위를 자랑하며 위세를 차리고 재산을 불려가며 살아가는 편을 택하였다.

이들이 그 지방의 무사 조직의 대표가 되어 자신의 가문을 일으키니, 타이라(平氏, 헤이시)와 미나모토(源氏, 겐지)라는 가문이 서로 경쟁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관동 지역에서 커진 미나모토 가문은 후에 자손인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가 역시 무사 조직들을 통합하고 이끌어서 카마쿠라(鎌倉)에 그 본부를 둔 카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 시대를 열게 된다.

*** 참고 ***
헤이시(平氏, 한자를 다른 방법으로 읽으면 "타이라우지"라고 한다 )와 겐지(源氏, 미나모토우지 )는
天皇이 신분이 낮은 후궁에게서 얻은 皇子皇女들을, 상급 귀족인 신하로 삼아 처우를 개선하고자 만든 씨족의 대표 이름이다.
이들에게는 천황가 이외의 有力 귀족으로서의 격식, 지위, 역할 등을 나타내는,
카바네(姓)를 같이 하사하였는데, 아소미(朝臣)라고 해서 위에서 두 번째 등급의 카바네를 하사하였다.

헤이시 중에서는 칸무텐노(桓武天皇737-806)에서 비롯된 칸무헤이시가(桓武平氏)가 武家를 일으켜 유명하다.

겐지는 사가텐노(嵯峨天皇786-842, 재위809-823)에서부터 시작되어 이런 관습이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 세이와텐노(56대 淸和天皇850-880, 재위858-876)가 하사한 세이와겐지(淸和源氏)라는 씨족이 역사상 중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여 유명하다.

이 세이와겐지의 자손들이 分家하며 사는 지역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그러면서 동일 씨족 내에서 권위를 가지고 구분될 수 있도록 묘지(苗字, 名字)를 만들어 세습을 하였다.
淸和源氏의 경우, 足利、新田、吉良、今川 등의 苗字가 있고, 또 이 중에서 新田家의 分家로 得川、?川가 있다.

그리고 뒤에 나올 이야기이지만, 흔히 부르는 토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의 경우,
근원을 밝혀서 이름을 다 쓴다면, 미나모토노아소미토쿠가와이에야스[源(氏) 朝臣(姓) 德川(苗字) 家康]라고 한다. 정식 문서에는 미나모토노아소미이에야스(源朝臣家康)로 썼다고 한다.

이렇게 氏, 姓, 苗字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쿠게(公家, 朝廷에 속한 문사 귀족)나 부케(武家) 출신이었다.
일반 백성 농민들은 그저 "어디 사는 누구, 뭐 하는 누구"라는 식으로 불려졌는데, 1875년(明治8年) 明治政府에서 "平民苗字必稱義務令"이란 법을 만들어 일반 백성들도 반드시 苗字를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대개 자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지었는데, "밭 한가운데에 집"이 있으면 "田中",  "산 아래에 집"이 있으면 "山下"라고 하였다. 이후 시대가 바뀌면서 氏, 姓, 苗字(名字)는 거의 같은 의미로 쓰여지게 되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여류작가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978?-1014?)가 쓴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라는 소설은, 어느 천황이 만든 겐지인지는 잘 모르지만, 신하가 된  황자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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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平安794-1192)의 말기, 교토에서 일어난 여러 싸움을, 귀족(대개 文士)들 밑에서 세력을 키우던 타이라(平氏)와 미나모토(源氏)의 무사 조직들이 대신 나서서 맡아 하며, 자신들이 文士귀족들을 제치고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의 귀족들이 아직은 나라 전체를 휘어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점점 칼을 든 무사들에게 권력을 내어주게 되니, 이 권력을 잡기 위해 1159년 타이라(平氏)와 미나모토(源氏) 사이에 파벌 싸움이 나고, 타이라 쪽의 승리로 끝났다. 타이라 쪽에서는 전국의 지방 관리인 고쿠시 자리를 자기들 친척으로 채워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력을 잡고 조정으로부터 공직을 받아 귀족화 되고 안일해져 가는 타이라(平氏) 무사 가문에, 전국의 호족이나 무사 집단들이 이들에게 다 고개를 숙여 선선히 자신들의 땅을 다 바친 것이 아니니, 교토에서 먼, 지방의 냉대 받던 호족과 무사 조직들이 결집해서 1180년 대항 세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러 힘 겨루기를 거쳐 1185년 타이라와 싸워 타이라를 멸망시켰다. 이들의 대표가 되어 싸움을 이끈 사람이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이니, 몰락해 가던 겐지(源氏)의 부활이다.

새로운 강자인 요리토모는 어디까지나 天皇이 있고 朝廷이 있는 율령제의 국가 체제를 무시하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관위(官位)를 부여받아 높은 지위를 유지하며 자신의 세력을 넓혀나갔다. 교토에 있는 조정과는 별도로 카마쿠라에 무사들의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고, 또한 주종관계를 맺은 고케닌(御家人)이라 불리는 부하 무사들을 잘 먹여살려야 했다. 그래서 1185년, 치안 유지와 세금 징수를 일을 맡은 치토(地頭)라는 관리로 임명해서 전국의 각 영지(領地)에 보내어 서서히 세력 확장을 하였다.

그는 1192년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이란 직위를 받아 드디어 소위,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사는 집, 곧 바쿠후(幕府)가 카마쿠라(鎌倉)에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 "카마쿠라 바쿠후"라는 무사정권(武士政權)이 시작되었다고 후세의 사람들은 말한다.

*** 참고 ***
*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은
奈良時代부터 平安時代 초기까지 세 명의 장군이 있었으며, 주로 東北地方의 원주민들을 정벌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군사 지휘관이다.
천황에게서 셋츠토(節刀)라는 칼을 받아 형벌의 전권을 이양받고, 정벌이 끝나면 다시 반환하여 임무를 끝냈다.
그리고 바쿠후(幕府)는 近衛府의 別名이며, 近衛大將의 집을 의미한다.
鎌倉幕府이후, 그 대표를 近衛大將이라 하지 않고 征夷大將軍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鎌倉幕府의 創設者인 源賴朝가 右近衛大將보다는 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기를 바랐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近衛大將은 天皇을 수호하는 정도로, 독자적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征夷大將軍은 천황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군사행동에 절대적인 권한을 부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源賴朝는 이 직위에 올라, 關東地方에서 뿌리내린 자신의 영역에 대해 조정으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성을 확립하고,
자신에게 속한 부하들에게는 절대적인 우위성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室町時代의 3대 쇼군인 足利義滿이후부터는 이 직위를 받기 위해서 겐지(原氏)의 長子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는 說도 있다.
이러한 최고 권력의 자리도 1867년 시대의 변화에 의해 폐지되었다.  

* 쇼군의 가장 중요한 일
御家人의 영지를 인정하고 지켜주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御家人에게는 새로운 영지를 분배해 주다. 재판을 통해 御家人 사이의 싸움을 중재하다. 막부의 정치, 군사의 최고 사령관. 고케닌에 대해서 이런 행동을 고온(御恩)이라고 한다.

* 고케닌(御家人)의 일

쇼군을 위해 전쟁에서 싸우다. 地頭, 守護가 되어서 영지를 지키다. 幕府의 관리로 임명되어 근무하다.

쇼군에 대해서 이런 행동을 호코(奉行)라고 한다.


* 역사상 주요 쇼군을 보면 (성이 달라도 세이와겐지의 원조인 세이와천황의 자손들이다)
1. 키소노요시나카(木曾(源)義仲 1154-1184) 淸和天皇으로부터 11대손. 1184년 자신이 쇼군이라고 칭하다.
    천황의 신하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강대한 힘을 과시하게 됨.
2.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 11대손. 1192년 쇼군되다. 이후 쇼군 직위가 후손으로 계승되어 쇼군이 武家政權의 우두머리가    오르는 자리라고 널리 인식시키다. 카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시대 시작 1192-1333)
3.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 16대손.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시대 시작 1338-1573)
4. 토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 25대손. 에도바쿠후(江戶幕府시대 시작 1603-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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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199년 요리토모의 사후, 화려했던 겐지 가문의 부활도 끝났다. 3대까지 이어지던 겐지의 쇼군 계승도 끊어지고, 바쿠후 내에서 여러 힘 겨루기가 생기다가, 1213년 호죠시(北條氏) 가문에서 바쿠후 지도 체제를 확립하였다.

1221년 점점 커지는 바쿠후의 세력을 꺾으려고 싸움(承久の亂)을 걸었다가 진 조정(천황과 문사 귀족들)은 더 이상 바쿠후 위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천황은 바쿠후가 옹립하는 황족의 한 인물이 되었고, 조정을 감시하는 기관이 세워졌다. 또한 쇼군의 지위는 여러 사람이 이어받았지만, 이 또한 쇼군을 보좌하는 지위(執權政治)에 있는 호죠시 가문의 권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천황이나 쇼군이나 이름뿐인 자리가 되고, 실질적인 나라의 지배는 호죠시 가문이 지도 체제를 이끄는 바쿠후가 거머쥐게 되었다.

이로써 1221년 이후 일본 역사에서, 물론 그 이전부터 천황의 권력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카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지고 잠시(1334-1336, 建武新政) 천황이 실질적인 힘을 지니고 문사귀족과 무사들을 통일시킨 정권이 세워지긴 하지만, 다시 무사들에게 빼앗겨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1336-1573)시대가 열리고, 그 후에 세워진 에도 바쿠후(江戶 1603-1867)가 무너지고, 1868년 메이지 천황이 나서기 전까지(明治維新) 천황과 조정은 대대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땅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잃어 버리고 바쿠후에 밀려 권력 없는 허수아비 통치자가 되었다. [메이지 이후의 천황들도 이름뿐인 지위를 유지했다. 현재의 125대 킨죠천황(今上(平成)天皇 1989.1.7~ )도 마찬가지이다. 실질적인 권력은 바쿠후의 쇼군과 같은 총리대신에게 있다]

또한 귀족(文士)들의 장원에 대한 영향력도 점점 쇠퇴하고 예전부터 장원을 감찰하려고 조정에서 내보낸 코쿠시의 직위도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귀족을 위한 장원제도는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의 "指出(大名에게 토지대장을 신고하여 大名가 모든 토지를 파악하도록 함) ",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太閤地?"이란 정책에 의해 완전히 소멸하였다]
이들 대신 바쿠후가 전국으로 파견한 슈고(守護, 군사 경찰의 임무)라는 관리가 각 지역의 땅과 관련한 여러 분쟁(늘어나는 무사들과 그들에게 배분되는 땅이 줄어들고 또한 상속법이 바뀌면서 작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분쟁 당사자가 서로 슈고를 자기편으로 하기 위해 따르다 보니 자연히 지방의 질서가 슈고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처음 요리토모가 나설 때만 해도 홀대를 받던 관동 지방의 호족들의 도움으로 일어섰고, 그리고 자신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이들 호족들의, 무사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그들의 신뢰가 두터웠다. 그러나 호죠시 가문은 일족의 번영만 추구했기 때문에 다시금 무사들의 반발을 사게 되고, 결국에는 1333년 카마쿠라 바쿠후가 몰락하게 되었다.

카마쿠라 바쿠후의 몰락 원인은 무사들끼리의 반발도 있지만, 무사에게 빼앗긴 권력을 다시 찾으려고 기회를 노리던 천황가와 문사 귀족들이 얼켜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고다이고천황(後醍 * 天皇1288-1339)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무사들의 도움으로,  실질적으로 카마쿠라 바쿠후를 이끌던 호죠시 가문을 몰락시켜 켄무신세(建武新政1334-1336)를 펴지만, 제일공신이었던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를 홀대하여 그의 반란으로 쫓겨났다. 1336년 현재의 나라현 요시노(奈良縣 吉野, 교토의 남쪽)로 쫓겨난 고다이고천황은 거기서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조정을 세우니 南朝라 일컬어졌다. 그리고 아시카가타카우지는 따로 코묘천황(光明天皇)을 그대로 교토의 조정에서 옹립하니 이를 北朝라고 한다. 이렇게 두 군데의 朝廷이 있는 南北朝의 대립이  60여년 계속 되었다.

아시카가타카우지가 새로운 천황을 세우면서 실질적인 권력자로 나서니, 이 때부터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1336-1573)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이런 호칭이 붙을 수 있게 된 것은, 처음부터가 아니라, 3대 쇼군 아시카가요시미츠(足利義滿)가 교토의 무로마치(室町, 현재의 京都市 上京區)에 새로 집(바쿠후)을 지은 후부터이다.

이 시대는 카마쿠라 바쿠후의 쇼군들과는 달리, 표면적으로 아시카가(足利) 가문에서 쇼군 지위가 계속 이어져 내려가 15대까지 약 240년간 영화(?)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초반 60여년은 남북조의 대립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바쿠후는 제일 우선으로 지방의 무사 세력들을 통합해서 바쿠후 편에 세워 남조와의 싸움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교토를 중심으로 한 지방으로 바쿠후 편의 무사들에게 슈고(守護)의 지위를 주어서 파견하였다.

이렇게 한 지역의 관리자가 된 슈고는 바쿠후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역할에서 벗어나, 카마쿠라 바쿠후 시대부터 그 지역의 권력자로 자리매김을 해 오던 전통이 있어, 단순히 "관리"라기 보다는 "영주(領主)"와 같은 성격을 더욱 강하게 지니게 되어, 바쿠후를 밑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보이지 않게 힘을 키워가니 어느새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1392년 남북조가 통일을 하여 천하가 바쿠후의 손안에 들어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이렇게 남조를 몰락시킬 수 있었던 것은 유력한 슈고들이 바쿠후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슈고는 領地에 대한 지배력이 더욱 강한 영주로서 커나가고, 바쿠후의 쇼군 권력은 더 이상 고케닌, 부하들의 땅을 지켜 줄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하였다. 여러 싸움을 겪으면서 바쿠후의 위신은 실추되고 그 지배력도 교토 주변 정도까지만 미치게 되었다.

또한 천황이 그러하듯이 쇼군 지위도 유력한 슈고다이묘나 바쿠후의 중진들이 내세우는 아시카가 가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옹립했다가 추방하고.. 이러다가 15대 아시카가요시아키(足利義昭)가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쇼군이 되었다가, 노부나가와 불화를 일으켜 결국엔 교토에서 추방당하였다. 이후 더 이상 쇼군 지위가 이어지지 못하니 무로마치 바쿠후도 막을 내렸다.

*** 참고 ***
슈고다이묘(守護大名)란,
우선, 슈고(守護)는 카마쿠라 바쿠후가 지방의 치안 유지와 무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임명한 지방 행정의 관직이다.
처음에는 경찰의 기능만을 가졌는데, 점점 朝廷이 임명한 고쿠시(國司, 지방의 경영)의 역할까지 간섭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다. 치안 유지 이외에 여러 권한이 주어지면서 이제까지의 문사 귀족들의 장원을 침범하여 힘을 키워나가니 결국 장원제는 붕괴되어 갔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도 단순한 관리의 지위를 벗어나 한 지역의 경영권을 점차 장악하니, 땅을 소유하게 되고, 그 지역의 무사들과 주종관계를 맺어 영주화(領主化)되어 가니 이를 슈고다이묘라고 불렀다.  이들 중에는 한 지역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도 있었다. 무로마치 바쿠후 말기에는 슈고다이묘가 66國에 있었다.
그러나 슈고다이묘들은 바쿠후의 정무에도 관여하고 있어서 대부분 교토에 거주하고 있었고, 유력한 가신(家臣)을 슈고다이(守護代, 守護代官)로 임명해서 그 지역을 실제로 지배하게 하였다.
오닌노란 이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슈고다이묘들이 몰락하고, 이런 슈고다이묘나 더 아래의 계층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이 다이묘가 되었다. 이를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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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시대가 쇠퇴하는 데는 "오닌노란(應仁の亂 1467-1477)"이라 하여, 교토를 중심으로 11년간 일어난 대란이 주원인이 되었다. 물론 이 대란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속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사건 사건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이를 기회로 여지껏 그나마 유지되던 사회질서가 확 뒤바뀌는 시대(戰國時代)로 돌입했기 때문에 역사상 더욱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것이다.

1441년 6대 쇼군이 암살되면서 슈고다이묘(守護大名)에 대한 강한 통제력을 상실한 바쿠후의 힘이 더욱 약해지게 되었다. 이후 쇼군의 지위는 이름만 남고 실제 권력을 잡기위해 쇼군의 측근, 바쿠후의 중진들, 슈고다이묘들의 힘 겨루기가 얼키고 설키고, 또한 쇼군가를 포함해서 각 가문에서는 상속권 싸움이 벌어지고... 따지고 보면, 단순히 남의 위에 서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그에 따른 먹고 사는 문제 때문이다. 예전처럼 주종관계만 잘 맺으면 많은 땅을 얻어을 수 있고, 그 주군(主君)이 능력있게 자신의 땅을 잘 지켜주는 세상이 더 이상 아니었다. 언제든지 누가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내 땅을 침범할 수 있다는 불안감... 조용해질 날 없이 전국 각지에서 10여년이 넘게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긴 세월의 싸움으로 인해 교토와 그 부근은 불에 타 폐허가 되었고, 전란을 피해 지방으로 옮긴 귀족들에 의해 중앙의 문화가 지방에도 퍼지게 되었다. 또한 이제까지 지배 세력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귀족들은 그나마 조금 가지고 있던 장원도 잃었다.
더 이상의 지배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혼란... 형식적으로는 율령제로 천황과 조정이 근근이 이어져가고 있지만, 더 이상 그들이 다스리는 나라도 아니고, 바쿠후의 지배력도 거의 없어진 상황이 되었다.
결국, 실력 있는 새로운 사람이 우두머리가 되고, 넓은 영토를 획득하여 다시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자신의 나라"를 세운 것과 같은 지배력을 발휘하는 세상(戰國時代)으로 바뀌어 나갔다.

센고쿠시대(戰國時代)는 무로마치 바쿠후에 더 이상 쇼군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1573)의 그 이전부터, 즉 오닌노란(應仁の亂 1467-1477)부터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끝나는 시기는 의견이 분분한데,
1568년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무로마치 바쿠후의 15대 쇼군으로 아시카가요시아키(足利義昭)를 앞세워 앉히면서 수도인 교토를 장악한 시기나,  
오다노부나가 이후 권력을 승계한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하통일을 한 1590년,  또는 그의 1598년 沒,
길게는 토요토미 사후 권력을 잡은 토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에도 바쿠후(江戶 幕府)가 시작되고, 마지막 대규모 싸움이라고 보는 1615년 오사카 나츠노진(大坂夏の陣)에서 패전한 토요토미씨(豊臣氏)족의 멸망까지 보는 견해도 있다.

전체 센고쿠시대에서도 좀 더 자세히 시대 구분을 짓는데, 1568년 오다노부나가의 교토 입성부터 1582년 그의 自害까지의 기간을 아즈치시대(安土時代, 노부나가의 본거지가 安土城)라고 한다. 1582년부터 토요토미히데요시가 권력을 잡고 천하통일을 한 후 1598년까지를 모모야마시대(桃山時代, 교토의 桃山에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伏見城가 있었기 때문 )라고 한다.
이후 토쿠가와이에야스에 의한 에도시대(江戶時代)는 1603년부터 1867년까지이다.

*** 참고 ***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란,
일부 슈고다이묘(守護大名)가 바쿠후의 지배에서 이탈해서 스스로 영지를 경영.
영지의 실질적인 업무를 보던 슈고다이(守護代)가 이름뿐인 슈고다이묘를 내쫓고 다이묘가 됨.,
슈고다이묘의 일개 부하였던 사람이 모두 물리치고 일어섬.

오닌노란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하극상(下剋上)의 풍조를 타고 대부분 위의 세 분류대로 그 지역의 영주로 나선 사람들이다.
이제까지의 슈고다이묘를 물리친 후, 예전부터 그 지역에서 살며 땅을 지켜온 무사들인 고쿠닌(國人)을 자신의 家臣으로 삼고,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그 지역의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 직접 관여하기 위해
그 영지 내에서만 효력을 지니는 分?法을 제정, 죠카마치 건설(城下町, 말 그대로 영주가 사는 성 주위로 마을을 만듦. 이 곳에서 상공업이 집중적으로 번성하고 현대의 주요 도시들이 여기서 더 발전한 것이다), 상공업자의 보호 통제, 교통의 요지에 슈큐에키 정비(宿?, 숙박 운송에 관한 것), 농지의 관개치수(灌漑治水) 등에 중점을 두고 영지를 경영하였다.
이렇게 朝廷이나 幕府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領地와 백성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다이묘가 대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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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다이묘들의 군웅할거 속에서 "혁명아(革命兒)"라고 칭할 정도로 두드러진 사람이 있으니, 오와리노쿠니(尾張國, 현재 교토의 동쪽에 있는 愛知縣에서 서쪽 지역)의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이다.
노부나가가 속한 오다(織田) 가문은, 두 파벌이 이 지역에서 슈고다이묘 대신 실질 지배를 하던 슈고다이(守護代)를 하면서 번성한 집안이다. 노부나가의 아버지는 그 한쪽의 家臣이었다. 가신이기는 하지만 주위의 다른 영지를 침범하며 어느 정도 힘을 길러 놓았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가 그의 사후 家長의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권력 싸움에 끼어들 수 있었다.
우선, 서로의 영지를 호시탐탐 노리는 오와리노쿠니 주위로 있는 큰 세력의 다이묘들과 싸워 이겨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였고, 1562년 오와리노쿠니 남쪽 다른 영지의 城主인 토쿠가와이에야스(?川家康 1542-1616)와도 동맹을 맺어 자기편으로 든든하게 다져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결국 오다 가문내에서도 힘 겨루기에 이겨, 1564년 오와리노쿠니의 새로운 센고쿠다이묘로 부상하였다.

이후 이 곳이 교토에서 가깝다는 이점을 살려, 교토로 가는 길 주위의 다른 다이묘들과 동맹을 맺고, 1568년 다른 지역에 있던 아시카가요시아키(足利義昭)를 무로마치 바쿠후의 15대 쇼군으로 내세워 교토에 입성하니, 바쿠후를 등에 지고 새로운 권력자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1576년에는 교토의 동쪽에 세운 아즈치城(安土, 현재 滋賀縣 安土町)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들과 싸워 제압해 가면서 朝廷에 대해서도 관여를 하게 되었고, 관위(官位)는 우대신(右大臣)까지 올라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천황의 자리를 자신에게 물려달라고 은근히 당시의 천황을 압박하기도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자 이번에는 스스로 쇼군이 되고자 하였다. 이미 무로마치 바쿠후의 15대 쇼군과는 不和로, 쇼군을 따르고 노부나가에게는 반대하는 세력과 싸워 이겨, 쇼군을 추방하니, 공식적으로 무로마치 바쿠후 시대는 끝이 나 있었다. 운이 더 따랐다면 얼마 후에는 정말 쇼군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노부나가에게 반대하는 다이묘 세력들이 남아있고, 그들을 평정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천황과 조정의 지배력도 없고 바쿠후도 없는 실력자만의 세상에서, 교토의 동쪽 지역(일본 전체에서 중부 지방)을 손에 넣고,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시점, 부하의 배신으로 궁지에 몰려 할복을 하고 말았다(本能寺의 變).
아즈치에 자신의 城을 세우고 전국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려 하는, 소위 "천하통일"을 눈 앞에 두고 노부나가의 시기는 끝이 난 것이다.

노부나가의 自害는 배신한 부하의 공격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단순한 개인적인 배신이 아니라는 說이 있다. 당시 노부나가의 새로운 권력에 맞서는 朝廷, 室町幕府의 잔재, 종교 세력, 그리고 패권을 다툰 다른 다이묘들의 경쟁심 등이 미묘하게 얽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어느 정도 증거로 볼 수 있는 자료들도 남아있는데, 노부나가를 공격하라고 지시한 인물이 이전에 노부나가에 의해 쇼군 자리에서 쫓겨난 아시카가요시아키(足利義昭)라는 설도 있다.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의 사후, 누가 그 권력을 이어 받을 것인가. 당연히 그 휘하의 무장들끼리 싸우게 되었고,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가 전면에 나서는 운을 얻었다.
히데요시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그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 줄 "주인"을 찾아다니다가,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의욕으로 가득찬 오다노부나가에게 발탁되었다.
노부나가의 교토 입성 후, 그의 강적들과 싸워 이겨 무공을 인정받아, 1573년 領地를 부여받고 城을 세워 다스리게 되었다. 이 경험은  武將으로서, 정치가로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많은 부하와 측근들을 거느리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름을 바꾸어 "하시바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칭하였다.
1582년 노부나가의 사후, 다른 무장들과 힘 겨루기 싸움을 시작했으며, 1584년 토쿠가와이에야스(?川家康)와 싸워 그에게 졌지만, 1586년 결국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복종함으로써 그를 신하의 위치에 두고 더 이상의 싸움을 피하였다. 이후 일단은 노부나가가 다져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자신에게 대항할 세력이 없는 상황이 되자, 힘없는 이름만 남아있는 천황과 조정에도 손을 뻗어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시작하였다. 1585년에는 천황을 보좌하며 정무를 보는 중책인 칸파쿠(關白)가 되었고, 1586년에는 官位 중에서 최고위직인 다이죠다이진(
太政大臣)이 되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조정으로부터 특별히 源氏와 같은 "토요토미(豊臣)"라는 씨족의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姓으로 역시 아소미(朝臣)을 받고, 묘지(苗字, 名字)로는 전부터 사용한 하시바(羽柴)가 있으니 이름을 다 써 보면, 토요토미노아소미하시바히데요시(豊臣朝臣羽柴秀吉)이다. 이렇게 해서 히데요시는 토요토미 씨족의 맨 위 조상이 되는 것이다.
흔히 부르는 "토요토미히데요시"도 정식으로 부른다면, "토요토미노히데요시"라고 해서 발음 가운데에 "노(の)"를 넣어 "토요토미 씨족 중에서 히데요시"란 의미를 나타낸다.

예전처럼 바쿠후가 따로 있지 않지만, 천황과 조정을 대신해서 히데요시가 지배력을 키워 나가니, 1587년에는 교토의 서남쪽인 큐슈(九州) 지방의 다이묘들을 제압하고, 1590년에는 동쪽의 간토(關東) 지방을 평정하여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이런 천하통일은 단지 칼을 잘 휘둘러 한 번의 싸움에 이겨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이러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먼저 농지에 대한 규제를 강압하여 다이묘나 호족들의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약하게 만들고, 큰 도시들의 자치 경영을 금지하면서도 상인들에게는 외국 무역을 장려하는 등 자신의 정책이 받아들여지도록 힘을 썼다.
그러나 영지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지는 것에 반발하는 다이묘들이나, 더욱 외국 무역을 하고 싶어하는 상인들의 욕구, 크게는 히데요시 자신의 권세욕을 채우기 위해 대륙 침략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592년과 1597년에 朝鮮을 침략하였다. 朝鮮을 지나 중국(明)에 首都를 세워 지배하는 꿈을 위해... 그러나 지친 싸움에 반대하는 다이묘들이 나타나고 히데요시 자신도 끝까지 밀어붙일 힘도 빠졌고, 1598년 아쉬움 속에 세상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다.

많은 다이묘, 무장들 중에서 홀로 일어나 세력을 잡은 오다노부나가, 그 노부나가에게 기대어 일어나서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은 토요토미히데요시. 두 사람 다 권력욕이 커지면 커질수록 군대의 총사령관격인 쇼군이 되고 싶어했다. 단순히 힘이 있어 다른 사람들 위에 있는 반항아보다는, 형식적으로나마 천황의 신하로 인정받아 자신의 노력을 합리화하고 부하들에게도 당당한 주군의 존재로 있고 싶어한 것이다. 쇼군이 되어 이전의 카마쿠라 바쿠후나 무로마치 바쿠후처럼 자신의 바쿠후를 세우기.
노부나가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교토나 아즈치城에 바쿠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손이 계속 이어져 내려 왔다면... 물론 어느 시점에서건 시대의 물결에 바쿠후도 변신을 했겠지만... 현재의 토쿄가 일본의 수도가 되어 번성한 것처럼, 교토 내지는 아즈치가 현재 일본의 수도가 되었을 수도 있다.

히데요시가 대륙 침략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얻고, 더 오래 살았다면 그도 쇼군이 되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그나마 어느 정도 족보를 따질 수 있는 가문의 자손이었지만, 히데요시는 지위가 높아질수록 자신의 출생이나 선조에 대해 뭐라 할 수가 없을 정도의 출신이다 보니, 드디어는 거짓 이야기를 퍼뜨려 어떻게 해서든지 쇼군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였다. 자신이 선대 천황의 이름없는 서자라고... 천황가의 혈통을 받고 겐지(源氏)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야 쇼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오래 살고, 정치 군사적인 지배력이 더 확고했다면 이런 거짓 이야기도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세운 오사카城에 바쿠후를 세우고 그 후손이 계속 이어지고... 그렇다면 현재 교토와 오사카(大阪)가 합쳐져서 일본의 수도가 되었을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히데요시가 과연 쇼군이 되어 자신의 바쿠후를 열고 싶어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는 說도 있다. 히데요시가 보았던 당시의 바쿠후나 쇼군이라는 위치는 별로 권위가 없는 이름뿐인 자리였고, 농민 출신이라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칼 들고 싸우는 武將보다는 가문 좋고 화려하고 우아하게 사는 쿠게(公家, 조정에 관여하는 문사 귀족들)가 더 우러러보였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을 어느 公家의 養子로 결연을 맺고 그 덕분에 征夷大將軍보다도 높고, 公家의 최고위라고 할 수 있는 칸파쿠(關白)와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에 오를 수 있었다. 천하를 손에 쥐었고, 우러러보던 公家들보다도 지위가 높은 히데요시에게 과연 바쿠후가 필요했을까. 더구나 대륙을 침략해서 성공만 한다면 대륙을 다스리는 황제가 되는데 작은 섬나라 일본에서 쇼군을 하고 싶어했을까...

*** 참고 ***
관위(官位)란, 중국의 律令制를 받아들여 생긴 것으로 官職과 位階로 나뉘어진다.
예로, 우리나라의 옛 조선의 경우 영의정에 해당하는 관직이 일본에서는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이다. 다이죠다이진이란 말이 관직이고, 위계로는 正1品, 從1品이 있었다.  右大臣 左大臣 內大臣은 正2品 從2品이다.
셋쇼(攝
政)는 천황이 어릴 경우 대신해서 政務를 보는 자리이고,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취임한 칸파쿠(關白)는 성인이 된 천황의 보좌역으로 있는 자리이다. 대개 大臣이 겸임한다.

말이 율령제고 조정이 있고 천황이 있지만, 더 이상 무사 정권하에서 지배력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 즉 타이코켄치(太閣檢地)로 인해 莊園도 없어지고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한가지 연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관위를 "파는"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조정이 있는 교토에서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관위지만 천황의 옥새가 찍힌 센지(宣旨, 명령서, 임명장)를 받으려고 수많은 다이묘들이 돈과 물건을 바쳤고, 천황과 조정은 이로 인해 그나마 그 지위가 보전된 것이다. 다이묘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자신이 더 이상 반항아나 혁명아가 아니라는 정당성을 보여주며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려는 생각에서 관위는 필요한 것이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도 다 센지를 받아 관위가 높아졌고 천황과 조정을 100% 무시하지는 못했다. ******

*** 참고 ***
타이코켄치(太閣檢地 1582-1598)
토요토미히데요시가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소작료(年貢)를 확실하게 걷어들이기 위해 실시한 정책이다.
측량 단위를 통일하고, 전국의 논밭의 면적과 토지의 질에 대해 조사를 하였다. 그리고 쌀로 환산한 生産高(石高 코쿠다카)를 정했으며, 논밭마다 경작자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여, 이 장부를 다이묘(大名)에게 제출하게 하였다. 장부에 적힌 농민은 경작권을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그 지역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각 지역을 휘하의 영토로 만들면서 행한 토지 조사는, 정복지를 확실하게 파악하여 전국 통일의 기초가 되게 하였고, 이제까지의 복잡한 토지 소유 관계를  영주(다이묘)와 농민의 관계로 간단하게 정립하였다. 긴 세월 文士귀족들이 소유해 왔던 장원은 완전히 없어지고, 영주는 아니지만 농민을 지배하며 힘을 키우려던 호족이나 유력 농민은 더 이상 세력을 키울 수 없게 되었으며, 경작권을 못 받은 농민은 직업 군사로 나서 兵農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작권을 가진 농민이 해마다 바치는 소작료(생산의 3분의2)로 지배계급인 무사들을 기준을 정하여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정책은 결국 토쿠가와이에야스가 에도바쿠후를 세우고 전국을 지배하는 데 기본 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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