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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도시의 근대화 교토(京都) (1)

 

서양의 외국인들에게 일본의 교토(京都)는 "일본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들에게 이전부터 알려진 "ZEN(禪)"이란 단어와 함께, 교토의 거리, 장중한 절과 신사, 가끔씩 지나가는 화려한 의상의 게이샤(藝者),
먹기에도 아깝게 얄미울 정도로 예쁘게 나오는 음식들, 모든 격식을 다 갖추어서 즐기는 정중한 다도(茶道)...
이런 이미지의 신비한 교토를 한번쯤은 누구나 가보고 싶어한다. 교토를 보지 않고 일본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몇 번 교토를 다녀보고 나니 언제부터 "교토 = 일본" 이 되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 일본의 다른 도시, 농촌에 가서 보면 토쿄와 교토 스타일은 너무나 다른 행성의 먼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런 별나라 이야기를 언젠가 TV에서 보게 되었다. 왜, 어떻게 별나라가 되어 유독 반짝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교토는 역사 도시이다.
이 곳 교토에 수도가 세워지며 시작된 헤이안시대(平安, 794-1185) 이래 천황은 이곳에 머물렀고, 수많은 귀족들도 거처하였으며,
절이나 신사들도 세워지고, 상업도 발달하고... 한 도시로서 틀을 갖춘 곳이었다.
그러나 정말 "역사 도시" 라고 자랑할 만큼의 오래된 건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관광의 중심이 되는 절과 신사들은 근세 이후에 복원된 것이며, 동네 주택거리도 2차대전전후로 재정비된 것들이 "역사" 의 실체이다.
더 자세히 본다면, "역사의 보존과 근대화" 라는 모순되는 생각들이 만나서 새롭게 일구어낸 "역사 도시" 라는 창작물이다.

1868년 메이지(明治 ~1912)시대가 열리면서 천황과 귀족들은 현재의 토쿄로 권력의 중심을 옮겨 버리고,
이에 따라 이들을 받쳐준 상인들도 떠나 버리니, 교토는 그저 평범한 지방 소도시로 몰락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힘없던 천황이어도
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바쿠후(幕府)의 쇼군(將軍)이 있는 토쿄에 대해서 자존심 하나로 버텼는데 이제는 그마저 없어진 것이다.

이런 교토를 살리기 위해,
1868년 중앙집권제의 지방자치단체로 탄생한 교토후(京都府, 교토市는1889년)의 2대 知事인 마키무라 마사나오(
?村正直, 1834-1896)는 "京都策" 이라고 불리는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다.
일본의 어느 지역보다도 먼저 근대교육 제도를 확립(1869년 일본 최초의 소학교 개교)하였고,
중앙 정부의 정책이기는 하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서양으로부터 발달된 기술을 받아들여 직조업이나 도자기 산업을
근대적 공업으로 바꾸어 나갔다.    그러나 마키무라 지사는 너무 근대적인 것에 집착하다 보니, 예전부터의 전통적 행사들을 무시하여
금지하는 경우가 많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비와코소스이의 한 부분과 주위에 일부러 심은 벚나무.

이 후 3대 지사가 된 키타가키 쿠니미치(北垣國道, 1836-1916)는
전임자보다는 유연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근대화 우선의 정책을 폈다.

이 지사의 업적으로 유명한 것이 비와코소스이 사업(琵琶湖疏水 제1기 1885-1890, 1894,  제2기 1908-1912)의 완성이다.

이를 통해 토목 기술의 발전과 전기와 위생적인 수돗물 공급을
하게 되어 근대화의 기본을 다졌다고 할 수 있는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들 시설물의 모양새이다.

기본적으로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서 시작한 "근대화" 라는 것이 서양의 열강에 비해 하찮은 국력을 잘 키워보겠다고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술을 배워서 만든 "작품" 에, 그 서양의 아름다운 분위기를 내는 것이 작품의 "완성" 이라는 생각을 지녔던 것 같다.
예로, 난젠지(南禪寺) 경내를 지나가는 水路를 지형적인 이유도 있지만 고대 로마의 水道橋를,
소스이 터널의 입구도 서양에서 본따온 것이다. 한편으로는 과연 당시에 소스이의 역할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웠는지는 의문점이 많다고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이런 "완성" 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교토의 근대화 사업이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두 사진의 왼쪽이 비와코소스이이다. 각각 미국과


독일에서 터널의 입구 모양을 따 왔다.

 


비와코소스이의 터널로, 작은 나룻배가 터널 벽의 줄을 잡고
통과할 정도의 넓이이다.

 


교토 시내의 북서쪽을 보며 찍은 것으로, 가운데에 고쇼와
나무가 울창한 교엔이 있다. 오른쪽 끝에 짙은 회색으로 살짝 보이는 것이 비와코소스이와 연결되는 카모가와(鴨川)이다.
강을 건너면 히가시야마 區의 오카자키 지역이다.

 


남북으로 보이는 교엔과 가운데의 고쇼. 가운데에 보이는 하얀 부분은 그냥 흙을 깔아 만든 길인데 동서로 대문이 있어서
일반 시민들이 여기를 거쳐 지나간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생겨진 바퀴자국 길을 여기저기
어지럽게 또 만들지 않고 계속 같은 길로만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얀 모래 길에는 자전거 길이 하나로만 나있다.
고쇼에 대한 예의인가 싶다.


고쇼이다. 생각보다 커다란 곳이 아니다. 워낙이 힘없던 천황들이 살던 곳이니 저택 수준이다.




 

전통을 무시하는 근대화 정책이 우선시 되는 상황에서,  교토가 "역사 도시" 로 자리잡는 계기가 된 특이한 공사가 1877-1883년 사이에 교토 한복판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현재 "교토교엔(京都御苑)" 이라 불리는 국민공원의 조성 공사였다.

이 안에 위치한 "고쇼(御所)" 는 원래 천황이 살던 궁으로, 그 주위로는 미야케(宮家, 천황의 친척)와 쿠우케(公家, 문관 귀족)의 저택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메이지 천황과 귀족들이 토쿄로 옮겨가면서 이 곳은 황폐화가 되었고, 어느 날 여기를 다시 찾은 메이지 천황은, 그래도 천년이 넘게 조상 천황이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보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후 고쇼 주위의 집들은 다 철거되고, 경계선으로는 돌담을 쌓고, 꽃과 나무가 심어져 현재의 東西 약 700m, 南北 약 1300m, 면적 약 63ha의 교토교엔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의 황량한 논밭뿐인
히가시야마 區의 오카자키 지역이다.


헤이안 진구의 어느 건물을 세우기 위해 쌓은 발판들.
 

이런 천황의 의지를 받쳐주는 또 다른 신념(?)이 있었는데, 메이지정권의 內治 중심 인물인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1825-1883)라는 정치가의 활약이 컸다.
교토 출신의 이와쿠라는 에도 시대 말기부터 천황을 중심으로 무사 권력과 합치는 쪽으로 주장을 펴 왔는데,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그런 천황과 황실의 옹호를 이제는 국제 사회에서 일본 이라는 나라를 인정받기 위한 문화전략으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과거에 힘없던 천황들이었다 해도, 그들의 역사가 남아있는 곳을 훼손되게 방치한다는 것은, 황실의 정통성을 일본인 스스로 무시하는 것이 되니 누구 앞에서 당당할 수 있으랴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와쿠라는 천황의 즉위식을 교토의 고쇼에서 거행하고, 헤이안 시대를 열은 칸무천황(?武天皇, 737-806)의 神靈을 모시는 사당인 헤이안진구(平安神宮)를 고쇼 안에 창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천황의 즉위식이 고쇼에서 이루어졌고, 근처에 헤이안진구도 세워져서 현재의 수도인 토쿄에 대해서 또 하나의 역사적인 수도(都)로서 교토를 확실하게 인식시켰다. 결국 이와쿠라의 노력으로 근대화에 앞서 나가면서도 교토는 역사도시라는 간판을 달게 되었다.

고쇼의 동쪽, 카모가와(鴨川)를 건너 현재의 히가시야마구(東山區)로 불리는 곳에 오카자키(岡崎)라는 한 지역이 있는데, 1895년 당시 논밭 뿐이던 이 벌판이 "근대화의 상징" 과 "역사 세우기" 의 현장으로 주목받는 일이 벌어졌다.

헤이안환도(平安還都) 1100년을 기념해서 헤이안진구(平安神宮)가 창건되었는데, 건물의 모양새도 이전의 宮을 상징하듯이 특별하게 지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외국을 본따서 일본 국내에서 열리던 "內國勸業博覽會" 의 4회째를 근처의 오사카(大阪)와 치열하게 경합을 해서
유치하게 되었으니, 근대화의 상징인 비와코소스이가 주목을 받았다. 또한 소스이에서 얻은 전력으로 노면전차(路面電車, 이후 1915년에는 일본 최초로 도로조명도 설치됨)가 달리니, 쇠퇴하던 옛 수도에서 화려한 부활을 한 셈이었다. 전혀 다른 듯한 두 목표가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교토를 키워가게 되었고, 어찌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국가로 크는 데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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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편 중에서 첫 방송을 보고 나니 무척이나 흥미로워 추가 설명을 붙여가며 정리하였다.
우선은 대단한 역사처럼 폼을 잡는 교토 사람들에게 "에게 ~ 별거 아니네 ~"  라고 말 할 수 있다는 느낌인데...   이 후의 예고편을 보면 사람들의 노력만큼은 박수 쳐 주어야 할 것 같다. 또한 교토를 다니다 보면 역사 도시 답지 않게 서양풍의 건물들이 눈에 많이 뜨이는데, 이 방송은 그런 면을 좀 중시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것은 정말 새로운 교토의 모습이어서 끝까지 보아야 한다.


내국권업박람회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전시실이 들어간 임시 건물들인 것 같다.
 


헤이안 진구의 대문인 응천문(應天門)을 지나 들어가면
건물들이 좌청룡 우백호를 상징하듯이 좌우로 있고
가운데에 본전(本殿)이 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일어난, 이전까지의 중국의 당풍(唐風)문화가 점차 사그러지고, 현재 일본 고유의 문화라고 불리는 것들이 발전하였다. 이를 국풍문화라고 한다.
헤이안 진구는 이런 문화를 결집한 상징으로 해석된다.


중국의 건물 같은 백호루(白虎樓)


 

 

근대건축으로 보는 교토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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