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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건축으로 보는 교토(京都) (2)

 

메이지 시대에 들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서양의 문명 덕분에 낙후될 뻔 했던 교토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외면상 바뀐 것이 많다.
사람들은 양복을 입고, 전차를 타고, 우편제도를 이용하고, 전신 전화로 의사 소통이 빨라졌으며, 그 외 근대의 상품과 시스템으로 인해
세상의 빠른 변화를 느꼈다.
그리고 건축면에서도 눈에 띄이는 것은, 텅 빈 宮인 고쇼(御所)와 니죠성(二條城) 주위의 떠나 버린 귀족이나 무사의 집이 여러 이유로 소실되고 빈터로 남아있다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근대화의 상징적 건물이 들어섰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자그마한 전통 가옥들 사이로 불뚝 불뚝 서양식 건물이 솟아 오르니, 1881년 고엔(御苑, 고쇼를 둘러싼 공원)가 정비되고 그 주위로 교회나 학교 시설이 들어섰다. 고엔의 북쪽으로는  同志社대학, 서쪽에는 平安女學院, 남쪽에는
ハリストス 正敎會가, 동쪽으로는 京都法政專門學敎(現 立命館大學)이 세워졌다.
번화가였던 산죠도오리(三條通)에도 금융기관이나 신문사 등, 근대화를 이끌어가는 시설이 세워졌다.

 

 

 

불교 대학이면서도 건물 양식은 서양식이다. 그러나 실내는 정면 가운데에 전통 양식의 불단을 만들어 놓아 미묘한 절충을 하였다.

 

 

그러나 실제 교토에서 살고 있는 서민들의 주거 생활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예전의 사진을 보아도 서양식 건물들이 눈에 띄이기는 하지만, 교토의 전체 면적을 압도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서민 가옥이고, 그들 생활의 기본이 되는 지역사회의 구조나 전통적인 체질은 계속 남아 있었다.  실제로 교토시의 議會는 긴 세월을 두고 전통적 체질의 이익대표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토쿄나 오사카에서는 신흥 자산가들이 의회에 진출하지만, 교토에서는 전부터 이름있는 집안 출신의 인물들이 교토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 중에는 "京都策" 이라고 불린 근대적 산업 부흥 정책이 별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크다. 역대 知事들이 세운 공장들은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들이 꿈꾼 새로운 산업은 더 이상 자라지 못했고, 신흥 자본가도 없었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는 전통적인 "지역의사소통조직" 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런 조직을 통해서 근대가 되도록 서민들의 생활과 전통은 확고하게 유지되었고 지금까지도 제어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 3대 마츠리 중의 하나인 "기온마츠리(祇園祭)" 는 아직도 지역 주민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니, 공동체 조직의 힘이 강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조직형태가 근대가 되어서도 유지된 결정적 요인은 소학교(小學敎)의 學區를 쵸구미를 기본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나뉘어진 쵸구미로 빨간 점은 소학교를 나타낸다

근대 교육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소학교의 설립은 교토 근대화
정책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었고, 실제 1869년, 일본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교를 하였다.
여태까지의 쵸구미가 좀 복잡한 면이 있기 때문에 "반구미(番組)" 라는 명칭으로 새로 재편하여, 반구미 한 곳마다 소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쵸구미 마다 있던 지역 모임 장소가 자연스럽게 소학교로 옯겨지게 되어, 지역행정 시설로도 이용되었다.
이렇게 소학교를 통해서 자치 조직을 재편성하였다는 것은, 근대화 우선의 정책과 전통 고수의 의지가 큰 충돌없이 섞이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때문에 토쿄나 오사카처럼 더 빠른 근대화나 도시 기반 시설 사업은 늦어졌지만, 다른 면으로 교토 특유의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
메이지 초기에 지어진 학교 전물은 대개 木造였는데, 점점 노후화 되어 다이쇼(大正 1912-1926) 에서 쇼와(昭和 1926-1989) 로 넘어가는
시기에 대대적인 재건축붐이 일어났다.
소학교는 교육의 의미도 있지만, 각 지역의 전통의식과 자부심의 상징이기 때문에, 지역 주민으로부터 많은 기부금을 받아서
耐火구조인 철근콘크리트의 호화로운 건물로 시내 곳곳에 세워졌다.  

*** 자치조직 "쵸구미((町組)"

교토의 쵸슈(町衆)라고 불리는 유복한 상공업자들의 自治 自衛 의식에 종교적 신심이 어우러져서 일어난 텐분홋케노란(天文法華の亂 1563년) 이후, 더더욱 자치 의식이 강해져서 그들이 사는 동네의 단결과 조직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전부터의 "쵸(町)"라는 작은 단위를 몇 개 합쳐서 "쵸구미(町組)" 라는 큰 단위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쵸구미" 마다 카마에(構, 높은 흙담)나, 호리(堀, 물길)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었다. 또한 몇 개의 쵸구미 가 합해져서 더 큰 단위의 가미교(上京), 시모교(下京)로 나뉘어졌다.
이후 1869년에 종래의 쵸구미가 개정되어 가미교 시모교 합쳐서 65組로 재편되었다.

*** 일본내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교토의 자랑거리 
1. 소학교 개교 - 1869년 5월 上京第二十七番組小學校(나중에 柳池소학교)의 개교식이 이루어졌다. 각 지역 주민들의 기부와 헌금으로
                         건물이 세워져, 전체 64 군데의 소학교들은 중앙 정부에서 정식으로 學制를 정하기 3년 전에 이미 개교를 한 것이다.
2. 수력발전소의 완성 - 1891년 비와코소스이(琵琶湖疏水)를 이용해서 케아게(蹴上) 발전소가 완성하여 지금까지도 送電을 한다.
3. 전차의 운행 - 1895년 京都電氣鐵道株式會社 운영의 전차가 6Km 정도의 거리를 운행하였다.
                         이후 市에서 운영하는 電車와 경쟁하다가 흡수되고, 1978년에는 아예 市電도 폐지되었다.
4. 영화 상영 - 한 실업가가 프랑스에서 흥행권을 따서 들여온 상영 기계(cinematographe)로 1897년 실패를 거듭하다가 성공하다.
                      이후 교토에 日本活動寫眞株式會社가 설립되어 時代劇을 중심으로 한 영화 산업이 발달하다.
5. 중앙도매시장의 개업 - 1927년 개업. 처음으로 만드는 시장 건물이기 때문에, 물건을 나르는 車들의 動線을 편하게 설계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이후 다른 도시의 도매 시장들도 이 곳을 본받아 지었다.

 

 

전체적으로 소학교(초등학교)의 건물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조그마한" 크기를 넘어섰다.
정말 확실하게 돈 들여서 그 지역의 자랑거리로 만들어졌으니 지금까지도 보존되나 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학교에서 아이들은 공부를 하고,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당하고 배우는 곳이 되었다.
운동장에서 아침 조회를 하는 사진을 보면 아직도 우리에게도 남아있는 충성(?) 의식이다.

시내의 서본원사라는 유명한 절의 뒷편에 불교대학이 있다. 외형이 서양식이어서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시내 곳곳의 서양식 건물들은 거리 구경을 하다가 묘한 느낌에 한 번 더 자세히 보게 만든다.
대다수의 서민들이 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게 보이는데도.
 

 

근대건축으로 보는 교토  (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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