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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건축으로 보는 교토(京都) (3)

 

근대적인 학교나 공장, 업무시설등이 하나둘씩 교토 시내에 세워지면서, 도시 전체의 공간을 좀 더 근대적으로 개편하려고 했지만
지역공동체의 반대가 심했다.
근대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이 예전부터의 도로를 넓히는 것인데, 좁은 길을 마주하며 오손도손 지내던 서민들에게 갑자기
큰 길이 생겨 멀어진다면 서로간의 대화를 단절시켜 공동체가 분열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지 말기부터 시작된 "3대 사업" 덕분에 점점 "도시 공간" 이 어떠해야 하는지 느끼며,
자의반 타의반 "모던한 도시" 라는 것을 지향하게 되었다.

메이지 초기에 사람들은 떠나고 작은 소도시로 전락할 뻔 했던  교토였지만, 근대화의 기수가 되겠다는 계획하에 여러 사업들이 벌어지고 사람들은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 근대적인 산업은 결국 번창하지 못하고, 전통 산업들이 부흥해 인구가 2배 이상 늘어나니, 하수도나 수도, 도로 사업에 대해 반대하던 주민들 스스로가 도시기반 정비를 원하는 상황까지 다다른 것이다.
1대 교토 시장이 계획한 내용들이 지지부진하다가 이런 상황과 맞물려, 2대 시장이 취임했을 무렵 자연스럽게 추진되었는데,
세 가지 사업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三大事業" 이라고 불렸다.
즉, 제2 비와코 소스이의 건설, 상수도의 정비, 도로확충, 전기궤도부설 작업 이다. 1908년에 기공식을 하고 단 4년만에 이 모든 것을 이루니 대단히 놀라운 추진력이었다고 평가받았다. 물론 토쿄나 오사카에 비해서 늦게 시작한 사업이기 때문에 미리 배운 것이 있어서 할 수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반대만 하던 자치조직들이 일단 시작하는 것에 동의하면서부터는 일사천리의 추진력을 지닌 협력체제로 바뀌어 이루어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여러 계획들이 실제 이루어지고 도시의 모습이 좀 바뀌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생활도 크게 바뀐 것은 아니다. 도리어 왜 넓은 도로를 만들었는지 뭐에 쓸 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길을 건너다가 감기 든다" 라고 야유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15년 이 횡량한 도로 위에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획기적인 일이 벌어졌다.
예전의 岩倉具視가 주창한 "京都의 舊慣保存" 덕분에 토쿄에 살고 있던 다이쇼(大正 1879-1926) 천황이 일부러 교토에서 늦게 즉위식(大正4년)을 올린 것이다. 힘은 없었지만 단절되지 않았던 천황가의 역사를 이제는 권력자가 되어서 만천하에 보란 듯이 알리는 행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넓게 만든 도로를 최대한 이용하니, 교토 사람들에게는 근대의 새로운 세상이 열림과 동시에 "교토만의"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길 가운데 전구 장식을 한 기둥이 있다.

즉위식은 옛 宮인 고쇼(御所)에서 이루어졌만, 한산하기만 했던 넓은 도로로 천왕의 행렬이 지나가니 시민들이 좌우로 꽉 메워 구경하고, 여기저기서 다채로운 봉축 행사가 벌어졌다. 거리 가운데에는 기둥을 높이 세워 전깃줄을 이어서 전구로 장식을 하니 규모로는 차이가 있지만 현재  루미나리에의 일본판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마을 단위로 좁은 길을 다니며 오손도손 살던 차원을 확 벗어나, 도로가 생기니 행사도 열리고 사람들도 모이며 새로운 사고의 차원이 넓혀졌다. 이런 것이 "근대"라는 것인가 하며 절실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전국적으로 "都市美運動" 이라는 유행이 일어나, 주로 서양식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디자인의 건물이 들어서면 사람들에게 화제거리가 되어 그 도시의 자랑거리로 여겨졌다. 그러니 당연히 전통적인 것들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교토도 역시 "역사도시" 라는 생각은 희미해졌다.

 

근대건축으로 보는 교토  (1)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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