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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推理) 소설과  드라마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TV 보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동고동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짧은 일본어 실력으로는 처음부터 뉴스나 빠르게 진행되는 오락프로그램은 쳐다볼 수도 없었고,  그저 만만하게 여겨지는 것이 드라마였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등장 인물들의 표정이나 상황으로 대강의 줄거리를 이해해 가며 보았는데... 대개 연애나 가족을 주제로 한 것은 썩 당기지가 않아  저녁 시간만 되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든 드라마가 있다.

"日本TV" 방송국에서 화요일 저녁마다 하는 "화요서스펜스극장(火曜サスペンス劇場)"이라는 제목의, 주로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드라마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릴 때 신기하게(?) 보았던 "수사반장"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일까, 아니면 내재된 인간의 파괴 본성이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인지...  어쨌든 그 시간대가 되면 하던 일도 접고 드라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처음 이 드라마를 접할 때는 일본어를 못 알아듣지만, 드라마의 구성상 처음부터 누가 살인자인지 가르쳐 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내용이 이해되었고, 다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일본어를 다 이해한 듯한 착각에 빠져서 즐거웠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서 "말"이 들리기 시작할 무렵에는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 배경이 되는 지역들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건'이라는 것이 늘 일상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인데, 유독 이 드라마는 유명한 관광지나 온천 등에서 꼭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의 해결과 함께 지역의 관광 안내도 겸하고 있는 것인데 그런 상황 설정이 너무 의도적이기도 하지만  돈 안들이고 일본 전 지역을 구경하는 것이니 그 또한 색다른 재미다.

이런 점을 어느 오락 방송에서 어느 연예인이 꼬집었는데...  이 연예인이 큐슈(九州) 오이타현(大分縣)의 유명한 벳푸(別府) 온천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 지역 사람들과 잠깐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지역에 유명한 온천이 있어서 좋겠다는 식으로 치켜세우다가, "큐슈로 말하자면 '온천', '온천'으로 말하자면 '살인사건'이군요" 라고 말해 사람들을 웃긴 것이다. '온천과 살인사건'이 어느새 일본인들의 머리 속에서 연관지어 떠오르도록 이 드라마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긍정하는 웃음이다.

또 다른 방송에서는 이런 관계를 더욱 자세하게 다룬 장면이 있다. 두 명의 연예인이 이 드라마의 구성을 빗대어 단순하게 나타내니,  일단 드라마가 시작되어 사건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는 장면에서 반드시 그 관광지(또는 온천)의 전경(全景)이 화면 가득히 잡힌다.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나고 해결을 위해 형사가 파견되면 대개 보조 형사와 함께 와서, 그 지역의 유명한 온천 여관의 노천온천(露天溫泉)에 몸을 담그고(여관 선전을 위해) 심각한 표정으로 사건에 대해 의논한다. 세 번째 범인이 잡히는 곳은 반드시 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며, 실제 관광객이 한적한 시간(사람들이 적어야 그 곳 분위기가 더욱 좋게 보이므로)에 잡힌다.  물론 내용에 따라서 도시 속에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이 방송을 시청하는 다른 지역 주민을 위해 은연중에 관광 안내를 한다.

이런 구경을 공짜로 하다가 3년이 다 되어갈 즈음에는 드라마 자체, 각본 자체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살인 사건이라는 것 하나만을 보면 너무 잔인한 장면이 그대로 나오기도 해서 고개를 돌려버리기도 하지만,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인간 관계의 얽히고 설킨 여러 문제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어떤 면에서는 누구에게서도 배울 수 없는 인간 관계의 기본을 새롭게 느끼게 된다. 살인 자체는 반대이지만  누구에게나 내재된 인간의 여러 본성(本性)을 어떻게 다스려야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해서 잠시나마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토쿄(東京) 옆 요코하마 시에 있는 중국 상점가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문고판에 담았다. 이 곳도 역시 시내 관광 코스이다.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시작하는 내용도   치밀하게 각본을 썼기 때문에  끝까지 전혀 지루하지가 않는데, 이런 각본의 원작은 거의 다 소설로 발표된 것들이다. 그 유명한 "명탐정 홈즈"부터 시작해서 일본에 가기 전에 읽었던 추리 소설들은 대개 외국 작가들이 쓴 것이었고, 우리나라의 작가는 누가 있을까 제대로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집 근처의 서점에 처음 갔을 때 좀 너무 놀랐다.   서점에 꽂힌 책을 보면 그 나라 국민의 의식 성향이 보이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수필집과 시집이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데, 일본은 추리 소설이 그렇다. 그것도 거의 문고판(文庫判, 책 크기의 한 가지. 세로 14.8cm, 가로 10.5cm)으로 된 것이 추리 소설다운 기괴한 표지(表紙)로 싸여진 채 맨 앞줄에 놓여있다. 작가들의 이름을 보면 거의가 일본인. 대충 잘 알려진 작가만 해도 370명 정도며,   실제로 일본추리작가협회(1947년 창립)에 등록된 작가와 만화가,   표지를 그리는 사람들이 거의 6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인구가 많아서 시장이 넓다고는 하나 그래도 너무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와는 다르게 시퍼런 칼날을 앞세운 무사문화(武士文化)가 그들 역사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죽고 사는 문제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의 일이라는 의식이 있어서 그런가...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여지나 보다.

책의 가격대가 450엔-700엔 정도로 점심 한 끼 값을 내고 이런 책을 사서 정신없이 빠져드는데,  언젠가 지하철 안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무슨 책을 읽나 궁금해서 슬쩍 넘겨보니 역시 '살인사건' 이야기. 그런 사람을 꽤 보았다.  일본인이 지하철 안에서 한가히 있지 않고 독서를 즐긴다고, 좀 따라 배우자는 투로 예전에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면 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다른 종류의 책을 읽고있는 사람도 꽤 보였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호기심에 쉽게 빠져드는 이런 이야기,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사람들간의 관계'를 철저히 파헤치는 이런 소설과 드라마를 단순히 피해야 할지, 아니면 어떤 각도에서 즐겨야 할지... 쉬운 문제는 아니다. (2001.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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