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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이야기

 

어릴 적, 입이 짧다고 어른들에게 구박(?)을 받던 내가 가장 좋아했던 밥 겸 반찬은, 방금 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에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먹는 것, 나중에는 '마아가린'을 넣어서 비비고... 뜨거운 김을 호호 불어가며 내 입보다 큰 수저로 싹싹 긇어먹던 그 밥! 그 어떤 좋은 반찬이 있었어도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남은 "어릴 적의 맛"은 그 때의 그 밥 맛이다. 농사 짓는 친척에게서 산 쌀로 지은 그 밥은, 반지르르하게 빛나며 찰기가 있었고 씹을수록 아스라한 단맛이 나왔다. 거기에 참기름이나 마아가린의 고소한 맛이 더해졌으니, 그 어린 입에도 침이 꿀꺽 돌았던 것 같다.

이 어릴 때의 기억이 강해서일까, 집밖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을 때면 다른 반찬 맛보다도 왠지 밥 한그릇의 맛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밥이 맛있는 음식점은 다른 음식도 맛있게 잘 하는 것 같았다. 단순한 돈벌이가 아닌 그래도 정성을 쏟아 만드는 밥과 반찬이어서 그런가 보다.

이런 밥투정꾼(?)이 1996년 일본에 와서 보니 왜 이리도 쌀값이 비싼지... 거의 우리나라의 두 배였다. 현재에도 싸다고 하는 것이 5Kg에 2000엔(약20,000원)이 조금 안되니,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10Kg에 30,000-50,000원까지 하는 가격대와 비교하면  정말 먹고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싼 쌀을 사서 밥을 지으니, 밥알이 텁텁한게 입안에서 즐겁다고 잘도 굴러다닌다. 5Kg짜리 한 봉투가 바닥이 날 때까지 오직 한 생각만 했다. 반찬 하나 안 해먹더라도, 간장에만 밥을 비벼먹더라도, 기필코 맛있는 쌀을 사서 먹으리라... 물론 비싼 쌀을 사면 맛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보아하니 여기저기 산지마다 상품화된 쌀들이 많아서 좀 망설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한 번 먹어 본 밥이 신선한 길잡이가 되었다.

오사카 시내의 신사이바시(心齊橋) 근처를 돌다가 머리 위를 쳐다보니 "오코메갤러리(お米gallery)"라는 간판이 보였다. 뭐 하는 데인가 싶어서 들어가 보니, 일본의 농업협동조합(JA)에서 열은 "쌀"에 대한 정보관이었다.


제일 맛있는 쌀로 니가타현 우오누마의 고시히카리 5Kg 한 봉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쌀 표본이나 산지 설명, 무언가를 보여주는 커다란 TV화면, 쌀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적은 카드들을 무료로 나눠주며 작은 포장의 쌀을 파는 곳, 그리고 한편에는 간단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설명이 아무리 좋아도 직접 먹어 보아야 그 쌀맛을 알겠다는 생각에 한 메뉴를 시켜서 자리에 앉아 밥그릇의 뚜껑을 여니, 아~ 갑자기 지친 몸에서 생기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모락모락 솟아나는 김 사이로 희면서도 투명한 밥알들이 나 보란 듯이 반질반질 빛나며 통통 튀는 것 같았다. 한 입 씹으니 역시 그 맛이다! 다른 반찬이 필요 없었다. 밥 한 그릇만으로도 대지의 영양을 골고루 다 섭취한 듯 몸도 마음도 충만...
나오면서 물어보니 그 당시 사용한 쌀은 "니가타산 고시히카리"라고 한다. 고시히카리... 우리나라에서도 얼핏 들어 본 듯한 품종인 것 같았다. 당장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봉투 사서 얼른 밥을 지으니 너무나 오래간만에 만난 반가운 知人같은 느낌이었다.

고시히카리를 알게 되면서 더 유심히 쌀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니 참으로 품종들이 다양하다. 일본은 1931년 처음으로 개발한 벼의 신품종을 등록하며 재배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300여종이 생겨났다가 인기를 못 얻어 사라지곤 했는데, 그래도 그 중에서 약 75품종이 면적의 차이는 있지만 아직까지 전국에서 재배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도 몇 품종이 들어와 있는데, 대표적으로 1969년 도입된 아키바레(秋晴)가 있다.

일본에서 인기 품종을 든다면, 단연 1등이 1956년부터 니가타현(新潟縣)을 중심으로 재배를 장려한 고시히카리(こしひかり), 2등은 1984년부터 아키타현(秋田縣)의 아키타코마치(あきたこまち), 3등은 1992년부터 미야기현(宮城縣)에서 재배한 히토메보레(ひとめぼれ)를 들 수 있다. 그 외에 쌀 생산량이 제일 많은 홋카이도(北海道)에서 1988년부터 주로 생산하는 키라라397(キララ397), 야마가타현(山形顯)에서 1992년부터 시작한 하에누키(はえぬき ) 등을 대형 슈퍼마켓이나 쌀가게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니가타현 미나미우오누마군의 벼베기 장면. 논 뒤로 보이는 산맥은 에치고산맥으로 (越後山脈 1900-2000m의 높은 산) 여기서 흘러 내려오는 눈 녹은 맑은 물이 이 벼들을 키운다고 한다.  2002.9.19 촬영 南漁沼郡JA사진

이 중 고시히카리를 제외한 나머지 품종은 주로 자체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지만, 고시히카리는 전국적으로 심어져 진짜 일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고시히카리라고 해도 지역마다 미묘한 맛 차이(결국엔 가격 차이)가 있으니, 품종이 가진 특성도 중요하지만 각 지역의 풍토를 무시하고 단지 품종 이름만 보고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간이 걸려 여러 산지의 고시히카리를 먹어 본 결과 그래도 니가타현(新潟縣)의 미나미우오누마군(南漁沼郡)의 쌀이 가장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5Kg짜리 한 봉투에 3100-3500엔까지 하는 가격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김치 한 그릇 놓고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더 이상 망설임이 없다.
실제로 일본에서 생산되는 쌀의 "맛 순위"에서 特A급을 받는 쌀이, 니이가타현(新潟縣)과 토야마현(富山縣)의 고시히카리, 야마가타현(山形顯)의 하에누키, 미야기현(宮城縣)의 히토메보레이다.

그 외 다른 쌀들도 A급은 받으니 사 먹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생산자나 정미(精米)해서 출하하는 도매회사들도 지역명을 굳이 감추거나 다른 눈에 뜨는 이름으로 일부러 좋아보이게 포장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봉투에는 지역과 품종명이 커다랗게 쓰여있을 뿐이다. 소비자도 지불할 수 있는 돈에 맞는 쌀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맛도 알 수 없으면서 어딘지 예쁘고 신선해 보이는 이름에 현혹되어 반신반의 하며 사는 일은 없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쌀이 있어서 품종 자체의 맛도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어떤 면에서는, "어떻게 밥을 짓는 것이 더 맛있게 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의외로 TV에서 많이 다룬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요리의 기본인 "밥 하기"를 너무 무시하고 살아온 기분이다. 다들 "밥 하기"는 그냥 쌀을 물에 씻어서 전기밥솥에 얹기만 하면 간단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니, 쌀의 가격이 처음에는 맛을 죄우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엔 사람의 "정성" 문제로 귀결되게 방송 프로를 만들어 낸다. 쌀 종류도 많고, 전기 밥솥의 종류도 천차만별로 많이 있는 세상이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정성"을, 먹고 사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인 "밥 하기"를 통해 깨닫게 하는 것 같다.


한 프로에서 보여주는 쌀 씻기 장면.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쌀을 씻을 때 바가지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에서는 그냥 전기밥솥의 밥통에다가 쌀을 넣고 곧장 씻는다.

어느 프로에서 본 방법은, 아주 획기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해 보니, 왠지 쌀 한톨이 더귀하게 여겨지고 이 쌀을 지어낸 사람의 노력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중요점은 빨리 쌀겨(막)를 벗겨내는 것이다. 물론 백미로 다 정미(精米)해서 나온 쌀이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얇게 또 막이 있다고 한다. 그냥 물에 훌훌 씻으면 뿌옇게 나오는데 이는 마지막으로 있는 막이 벗겨져서 그런 것으로, 다 씻어내지 못한채 밥을 하게 되면 빛깔이 좀 어둡고 약간 누린내가 난다.
그래서 우선, 쌀을 처음 물에 넣은 후 후루룩 저어서 얼른 그 물은 버리고 쌀만 바가지에 담아둔다. 첫 물에서 너무 오래 씻으면 마른 쌀에 누린내가 배어들기 때문에 일단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대개 손 바닥으로 쌀을 바가지의 바닥에 밀어내듯이 몇 번 비비다가 끝내는데, 이러기 보다는 쌀을 집어 손 바닥 안에서 싹싹 비벼대는 것이 더 쌀겨가 빨리 빠진다. 쌀 전체를 골고루 비벼대다 보니 그냥 물에 후루룩 씻어낼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왠지 처음으로 쌀을 자세히 보는 것 같다. 정성들여 한 톨 한 톨 목욕시켜서 때 빼고 광 낸다고나 할까... 그리고 열심히 비벼대다 보면 손 바닥도 빨갛게 되니 건강에도 좋지 않을까... 다 한 후 물을 넣어 헹구면 아주 하얀 우유같은 물이 나온다. 사실은 이 물 속에 쌀겨뿐만 아니라 여러 비타민들도 빠져 나와 아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막이 벗겨진 것이다. 이 물을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베란다의 화초에 조금씩 나누어 주었더니, 화초들이 신났다. 서로 질세라 하루가 다르게 삐죽삐죽 크며 화분이 좁다고 아우성이다. 하긴, 쌀뜨물을 그냥 하수도에 버리면 그 것도 수질 오염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데 그러느니 화초 자라는 재미가 더 좋지 않은가. 이렇게 쌀 씻기를 전체 3분 이내에 끝내야 일단 쌀뜨물이 흡수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중요점이 쌀이 수분을 충분히 흡수하도록 놓아둔다. 씻은 후 소쿠리에 건져 놓아 두면 쌀이 어느 정도 수분 흡수를 하지만, 나중에 밥솥에서 물 조절하기가 어려우니, 먼저 밥솥에 넣고 필요 분량의 물을 부어 30분-1시간 정도 불리는 것이 밥이 질게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씻고 수분 흡수를 시키지만, 밥에 윤기와 찰기를 더 하고 싶다면 꿀을 조금 넣어보는 것도 좋다. 쌀 3컵 분량에 꿀 1ts를 넣으면 단 맛은 거의 나지 않지만 전보다는 반지르르하게 보인다.

드디어 밥이 다 되어 뚜껑을 열면, 엄마 품처럼 편안한 "밥 향기"가 확 얼굴을 감싼다. 뜨끈뜨끈할 때 얼른 한 그릇 퍼서 잘 익은 김치 한 그릇, 아니 천장에 굴비 한 마리 매달아 놓고 한 번씩 쳐다보며 먹더라도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없을 것 같다. 일본인들은 우메보시(梅干し, 매실을 소금에 절인 것) 한 개면 족하다고...

참고로, 이런 맛있는 밥으로 오니기리(おにぎり, 삼각 주먹밥)를 할 때는, 밥 덩어리를 힘 좋게 꼭꼭 누르기 보다는, 손에 덩어리를 얹어 네 번정도 살짝 움직여서 삼각 모양을 내는 것이 좋다.
뜨거울 때 너무 만지면 밥알들이 들러붙어 나중에 먹을 때 떡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손에 물기를 살짝 묻힌 후, 밥알 사이에 살짝 공간이 생길 정도로만 뭉쳐 김을 씌우거나 깨소금을 묻히면, 식은 후에도 통통한 밥알들을 느끼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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