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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이야기

 

오사카에 도착해서 첫 겨울은 너무나 추웠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현관문을 열면 밖에서 찬바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방안에서 찬바람이 휘잉 하고 나올 정도로 집이라는 것이 불기 하나 없는 그냥 시멘트 상자이다. 문을 닫고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석유난로에 불 지피기. 매캐한 연기와 그을음 냄새에 왠지 눈물이 나고, 이 곳에서 3년을 살아야 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가기 전부터 일본어를 잘 알고 갔으면 그 것이 큰 힘이 되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련만,  이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니 언제나 일본어라는 '큰 산'을 넘을 수 있을까. 넘지는 못해도 산기슭까지는 가보고 싶은데... 결국은 시간이 해결할 문제이지만 조바심과 함께, 나 혼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제대로 다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을 그 추운 집에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도 썰렁, 마음도 썰렁. 희망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1월 말,  일본어 공부를 하러 가기 위해 집 근처의 작은 식물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무심코 화단을 한 번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런 추위에 저렇게 가녀린 꽃이 피어 있다니...   
바람에 쉴 새 없이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그저 환하게 웃는 꽃. 꽃잎은 마치 얇은 종이를 조금 구겨 놓은 것 같고,   흰색, 노랑, 분홍, 주홍의 네 가지 색깔이 그 화단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소박하면서도 화려함으로 얼어붙은 나의 마음을 녹인 그 꽃은 '포피(poppy)'이다. 양귀비과라고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 이후로 겨울이 춥지 않았다. 이렇게 겨울에는 포피를 만났고, 봄에는 벛꽃을, 그리고 여름이 되었다.  

'포피'의 봉우리.  언제고 활짝 필 날을 기다리는 "4형제"

부모와 자식 같은 봉우리.

안간힘을 쓰는데도 아직...


녹지공원 연못에 탐스럽게 핀 연꽃

 계절마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꽃들의 신비함을 겪어왔기에   또 무슨 꽃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가 되었는데,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6월말, 집 근처 녹지공원에서 나는 '연꽃'을 처음 보았다. 말로만 무수히 듣고 실제로 연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할 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다.  한국에서 내가 살았던 곳 근처에 무슨 연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일부러 백과사전을 찾아본 적도 없으니... 그저 본 것은 4월 부처님 오신 날 종이로 만든 연등뿐.
나는 어릴 때 심청전을 읽으며 궁금했던 것이 심청이가 연꽃을 타는 장면이었다. 수련은 본 적이 있어서 연꽃이 수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왠지 수련은 너무 작았다. 그 안에 앉을 자리도 없고...


탐스럽게 핀 연꽃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런 의문이 녹지공원의 연못에서 말끔히 풀어졌던 것이다. 옅은 분홍색의 봉우리가 올라와 어느 순간 슬며시 벌어지며 연밥이 보이는데  아, 정말 심청이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는 연꽃이 한참 작지만 상상력의 세계에서 안 되는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 옛날 힘든 현실에 지친 누군가가 연꽃을 보며 희망의 미래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두둥실 떠오른 연꽃 위에 올라타면 세상이 다시 보이지 않을까.  
세 번의 여름을 이렇게 연꽃과 함께 시작하며,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간들을 부푼 기대감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적마다 '나의 희망'인 포피와 연꽃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애썼는데,   역시 나는 초보자여서 어딘가 아쉬운 구석이 있는 사진만 찍었다.  무언가 아쉽다....    (2000.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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