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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교실 (2)

 


1999년2월. 큰 강의실에 책상을 나누어 놓고 공부. 선생님과 각 나라에서 온 학생들. 다들 그리운 얼굴이다.

미노市 국제교류협회에서 개설하고 있는   일본어 교실을 3년 동안 다니면서 가장 큰 수확이 있었다면 일본어를 알게 된 것도 크지만, 회화 시간에 나와 같은 '일본 속에서의 외국인들'과  흉금 없이 이야기하며 친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 1996년 10월부터 1997년 3월까지의  학기 동안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있어도 그 쪽이나 나나  일본어를 잘 모르기에 서로간에 대화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그저 인사나 나눌 뿐. 1997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학기에는  츠카다(束田) 선생님으로 바뀌었고 학생은 한국 사람 둘 뿐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집에서 혼자 공부가 가능해서 그런지 수업 시간에는 날라가듯이 진도가 나갔다.    

그렇게 해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2-3년 동안 배우는 교과 진도를 1년만에 끝내고  새 학기를 맞이하였다. 1997년 10월부터 츠카다 선생님 반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유학생인 남편과 함께 러시아에서 와서 여기서 3년을 공부한 이리나氏, 역시 유학생인 남편과 함께 몽고에서 와서 3년을 공부한 도야氏,  태국에서 유학생으로 왔다가 치과 의사인 일본인 남편을 만나서 10년째 살고 있는 피라트氏, 그리고 같이 공부하던 한국 사람은 다른 반으로 가서 나 혼자 남았다.    

나라별로 보면 5개국, 나이별로 보면 선생님이 50대 초반, 이리나씨 도야씨 피라트씨가 40대 초반, 그리고 내가 30대.  학생들끼리 일본어를 공부한 연수와 실제 실력도 다 다르지만, 어찌 되었건 초급의 교재를 다 배우고 새로운 교재로 들어가기 위해서 같은 반으로 묶인 것이다. 첫 수업 시간 내내 선생님은 이런 구성원들이 부담스럽고 걱정된다는 표정이었고, 다른 네 명은 왠지 나를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나 역시도 '잘 해낼 수 있을까,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 어느 정도 공부하다가 혼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안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머리 속이 꽉 찼다.


송별회 겸 파티에서 음식을 진열하는 모습.
이 날 마지막까지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대개 처음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 한국 아줌마들은 다른 외국어를 빠른 시일 내에 배우기는 어려운데 반해,  일본어만큼은 우리말과 비슷하고 한자도 알기 때문에 비교적 자신감을 가지고 배운다.

한 일 년 정도 배우고 나면 기본 문법이 끝나며, 생활하는 데 기본적인 회화도 알게 된다. 여기까지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같이 공부해도 별 무리가 없는데 문제는 그 이후이다.   일본어 교실에서 한국인만을 위한 반을 만들 정도로 선생님의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교과 과정이 비슷한 외국인과 같은 반이 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선생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인은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어서,  다른 외국인의 이해도에 맞추어서 거북이 걸음식 수업을 진행하고, 한국인들은 갑갑해서 한숨만 쉬고 있게 된다. 한국인들은 무언가 하나라도 더 빨리 빨리 많이 배우고 싶은데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서 결국은 일본어 교실을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대부분의 일본어 교실이 기본 회화가 가능해지고, 두 권의 교재가 끝나면 학생들을 졸업시키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는 갈만한 곳도 없었다. 집에 쳐 박혀서 혼자서 해야 하는데 그건 더욱 불가능. 그렇다고 매일 이웃의 일본인들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면서 말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말을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괜히 굽실거리며 친한 척 해야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일본어 공부 하나 하기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계속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도 같은 반 학생들과의 관계마저 정립해야 하다니 정말 힘들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도 기회가 왔다. 선생님이 어떤 문법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나 이외의 세 명이 전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니까 선생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도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일본어에 대한 감각(비슷한 문법을 가진 한국인만이 아는 느낌)이   다른 세 명과는 또 달라서 그들(한자도 모르고, 영어권에 비슷한 문법을 사용하는)이 이해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는 선생님이 늘 사용하던 말이니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중간 입장에서 조정 역할을 맡아 하며, 왜 한국인이 일본어를 빠르게 배우게 되는지에 대해서 떠듬떠듬 설명을 하니 세 명의 경계심이 풀어졌다.   

그 이후로는 나 역시 모르는 것은 선생님에게 물어가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 같이 이해하고 다음 진도로 넘어갈 수 있도록 그들 옆에서 보조를 맞추었다. 비록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한 단어라도 단순하게 사전적 의미만 외운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깊고 풍부한 무엇인가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들도 이전보다는 쉽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만족하고, 선생님 또한 새로운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이러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공부도 공부지만 개인적으로 친밀감을 서로 느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선생님은 우리의 말 표현법이 틀리면 그 즉시 고쳐주면서 선생님으로서의 할 일을 잊지 않았다.

1998년 5월, 드디어 서로간에 왠만큼 이야기를 털어놓고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고 다들 느낄 때,    각 사람의 집을 방문해서 점심 식사를 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5개국이니 난생 처음 러시아 요리도 먹어보고, 만두의 원조인 몽고의 '쇠고기 만토'도 먹고, 태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의 젓갈을 간장으로 사용해서 계란을 찍어 먹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젓갈이 태국에서 들어왔나 보다)

나중에는 멕시코 아줌마와 日係브라질 아줌마도 참여했다. 이런 만남을 통해서 서로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고, 어느 한 지역에 사는 사람이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 모든 편견이 눈 녹듯이 다 없어질 수는 없지만 그것이 편견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들 인정하였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 만남이 더욱 편해지고 즐거웠다.   

늘 공부 시간이면 우리 책상이 놓인 곳에서만 웃음소리가 터져 나와 다른 반 사람들에게 눈흘김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 같은 이런 모임을 가진 학생들이 그 이전에는 없었다고 한다. 같은 나라 사람끼리는 모여도... 이것이 한 터전이 되어 1999년 2월 귀국하는 사람들을 위한 송별회 겸 전체 파티가 처음으로 열렸다.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음식 한 가지씩 해 오니 호텔 뷔페가 따로 없었다.  

이렇게 3년을 한 곳에서 공부했지만, 2년 6개월 동안 같은 선생님에(대개는 6개월에 한 번씩 바뀜) 같은 학생들이 정말 특별한 모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나라에서는 다들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는데, 일본에 와서 말을 모른다는 사실 하나에 괜히 열등감을 느끼며 외롭게 살았었기 때문이다. 남을 이해하면서 말을 배우고, 말을 배우면서 자신을 되찾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2000.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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