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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富士山)에 오르다 (2)

 

호흡 때문에 비몽사몽하다가 뭔가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깨니 벌써 다락방에는 불이 켜지고 단체로 온 사람들이 짐을 싸고 있었다. 새벽 3시. 지금부터 출발해서 정상에 올라 4시반 정도에 뜨는 고라이코오(御來光, 높은 산의 정상에서 맞이하는 日出을 높여서 나타낸 말)를 보려고 한단다. 무슨 산악회 회원들이니 산을 많이 다녀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고산병이라는 것도 잘 안느끼는 것 같다.

하긴, 후지산 여행 안내책에 보면 왠지 체력 갖추기에 대해 강조하는 말이 많았다. 단순히 산을  오르기 위한 체력과 함께 호흡을 어떻게 편히 잘 할 것인지... 속된 말로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우리는 솔직히 후지산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3776m라는 표고는 완전히 무시하고 거리와 시간에 대해서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책에 쓰여진 그 시간도 높은 산을 많이 다녀 본 사람들을 기준으로 쓴 것 같다. 우리처럼 아무 생각없이 온 후지산 초보자들에게는 너무 벅차다.

이 야마고야(山小屋)까지 오는 도중에, 계속 주저앉고 싶은, 되돌아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몸보다 먼저 앞서려고 했지만 어여어여 추스리고, 몸으로 느끼는 인내심이 어떤 것인지 새삼 생각해 보며 올라왔다. 그리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이 산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의 상태를 보며, 새삼 존경스러운 사람들이 생겼다. 지구상에서 제일 높다는 산을 몇 번이고 올라가 본 사람들. 부와 명예는 손에 쥐지 못해 번지르르하게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것은 없지만,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긴 강인한 마음 하나 뿌듯하게 간직한 그런 사람들이 정말 부럽고 왠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뜨려고 하는 해를 기다리며.

뒤척이다 보니 어디선가 해가 뜬다는 말이 들렸다. 부랴부랴 신을 신고 나가니, 너무 춥다. 아니, 바람이 너무 불어 날라가 버릴 것 같다. 방한복의 모자 끈을 꽉 조여매고 야마고야 앞의 돌 기둥 아래 붙어서 기다리니 어째 위치가 좀 안 좋다. 나무 한 그루 없이 경사져 있는 산이지만 그래도 움푹 패이고 불쑥 나온 곳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잘 보이는 쪽으로 가 보았다.

발 아래 구름이 서서히 파랗고 보라빛을 띤 회색으로 밝아지면서 동쪽 하늘이 황금색으로 물든다. 산 위나, 바다 위에서 뜨는 해는 보았지만, 지금처럼 구름평선(?)이라고 할 수 있는 雲海에서 뜨는 해는 처음이다. 제대로 잘 뜰 수 있을지... 구름이 너무 많아 어영부영 대충 가려진 채 뜨는 것은 아닐지...


구름 속에서 솟은 해.

호흡 때문에 고생고생 하며 여기까지 와서 그런지, 전혀 계획에 없었던 일출이 지금은 너무 기다려진다. 머리 복잡한 세상살이는 저 두터운 구름 아래에 접어두고, 잠시간이지만 새로 태어나고 싶은 기분이다.

드디어 구름 사이로 붉은 빛이 보이며, 이 산에 올라온 모든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붉은 해가 세상을 가득히 비추며 평정한다.

그러나 아~ 환호성, 감탄... 왠지 이에 어울리는 소리조차 주위 사람들에게서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지만, 다들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에 번잡한 마음을 쉬고 자신을 녹여 버린 것 같다.

일본 TV에서 10년 넘게 하는 어느 가족 드라마가 있는데, 제목이 "와타루세켄와오니바카리(渡る世間は鬼ばかり)"이다. 예전부터 전해지는 말을 바꾸어서 만든 제목으로,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귀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걱정거리를 잔뜩 겪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귀신(걱정거리)'이 있기 때문에 '헤치고 살아나가는 의미'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저 아래 세상의 그런 '귀신(걱정거리)'들 사이를 의연하게 헤치고 걸어나가도록 자신을 녹여 더 강하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 어느새 똑바로 쳐다보기에는 너무 눈이 부실 정도로 높이 떠 버렸다.


반찬으로는 단무지, 빨간 우메보시,
소세지, 콩절임. 두부를 넣은 미소시루.

야마고야로 되돌아 오니 다들 아침을 먹는다. 따뜻한 미소시루(된장국)와 투명한 일회용 용기에 넣은 밥과 반찬이 전부다. 그러나 아직 새벽 5시 쯤이라 잘 먹히지가 않는다. 도시락으로 들고 가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 먹고 기운 내야지.

이제 다시 출발이다. 오직 정상을 향해. 여기까지 와서 힘들다고 내려갈 수는 없다. 정상 부근이어서 그런지 등산로에 더 돌들이 많아 먼지도 많고 발이 자주 미끄러진다. 그러나 잠시 쉬면서 뒤를 돌아보니 하늘은 새파랗고, 멀리 산 아래의 도시들이, 더 멀리로는 이즈반도(伊豆半島)와 태평양이 보인다. 괜히 손을 뻗어 주먹을 쥐어본다. 세상을 내 손안에...


정상의 모습. 분화구를 따라 일주한다.

마지막 힘을 내서 정상 입구에 세워진 토리이(鳥居)를 지나니, 드디어 정상이다. 새벽 5시반 쯤 큐고메를 출발해서 7시50분 도착이다.

사실 여기는 정확히 말하면 1단계 정상이라고나 할까. 여기에는 분화구를 중심으로 주위에 작은 봉우리들이 몇 개 있고,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켄가미네(劍ケ峰)가 표고 3776m로 실제적인 후지산의 정상이다. 그리고 분화구를 따라 1시간 반 정도 주욱 도는 코스에는,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기상 측후소, 쿠스시신사(久須志神社), 일본 전화 회사인 NTT 富士山頂分室의 특별 공중전화, 센겐신사(淺間大社奧宮), 몇 군데의 야마고야와 가게, 그리고 우체국(富士山頂郵便局)이 있다.

조금 쉬고 분화구에 가 보니 그저 그렇다. 움푹 패인 돌 구덩이 정도로만 보인다. 백두산처럼 물이 가득하면 멋있으련만... 후지산은 처음 등산로 입구부터 정상까지 정말 볼거리가 전혀 없는 산이다. 단지 산 전체의 모습을 멀리서 보면 홀로 우뚝 서 있어 웅장해 보여 그나마 사람들이 찾아오지 그렇지도 않았다면 잊혀질 산이다.


산을 내려가는 산악 차.

이리저리 구경하고 드디어 나의 목표인 우체국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엽서 한 장 보내는 것이 나의 후지산 등정의 마지막 절차이다. 생각보다 엽서가 비쌌지만, 뒷면에 후지산 기념 스탬프를 가득 찍으니 왠지 흐뭇하다. 발 아래 보이는 둥실 둥실 떠 있는 구름 위에 얹으면 시원한 바람을 타고 며칠 후 우리 집에 도착하겠지...

그러나 실제로는 등산로 입구에서 여기 정상까지 특별한 산악 차가 다닌다. 워낙이 나무 한 그루 없는 경사진 돌 길이어서 지그재그로 올라올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우체국 직원들도 일주일에 한 번 이것을 타고 와서 근무 교대를 하고, 우편물들과 다른 야마고야의 짐들을 운반한다.  

올라오면서 이 산악 차를 몇 번 볼적마다 내가 괜한 생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차는 등산객이 이용할 수 없지만, 한쪽에서는 땀 삐질삐질 흘리며 열심히 올라가는데, 또 한쪽에서는 산악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올라가니 산에 오르는 맛이 안난다. 다른 산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 낯설어서 그런지...


내려오면서 보이는 풍경. 사진 가운데 하얀 부분이 큐고메의 만년설이다. 그리고 더 아래로 작은 산들과 멀리 바다가 보인다.

아침 8시30분, 이제는 산을 내려갈 길이 바쁘다. 저 아래 고고메(五合目)의 주차장이 얼핏 보일 정도로 구름들이 흩어지고, 해는 머리 위에서 쨍쨍하다. 날씨도 좋고, 내려가는 길이라 숨도 덜 차고, 기분도 상쾌해서 금방 내려갈 줄 알았다.

그러나 돌 먼지 퍽퍽 일어나는 길이 끝이 없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내려왔는데도 고고메의 주차장에 도착하니 낮 12시.

온 몸은 먼지와 땀 투성이이고, 새벽 5시에 밥을 먹었으니 기운도 빠지고 지친다. 근처의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점심을 먹고 잠시 쉬다보니, 지금까지가 꿈결같다. 후지산에 올라갔다 온 것이 언제더라...


일출을 보고 야마고야로 돌아오는데 멀리 구름 위에 생기는
산 그림자가 보인다.
정상에서라면 전체 모습이 다 보인다고 한다.


산을 내려와 잠시 쉬고 국도를 달리는데
나 보란 듯이 후지산이 떡 버티고 서 있다.


후지산의 정상이다. 다 연결할 수가 없어서 나누어 놓았다.
이쪽은 후지노미야구치(富士宮口) 등산로로 올라온 곳이다.
회색 지붕의 야먀고야가 있고, 옆으로 돌담으로 지은 센겐신사가 있다.
깃발이 나부끼는 곳이 우체국이다.
멀리 봉우리 위에 집이 있는 것 같은 곳이 표고 3776m의 켄가미네이다.


센겐신사 옆으로 그대로 돌아보면 분화구가 있다.
그리고 주위를 일주할 수 있는 길이 이어져 있다.
산의 경사 뒤로 구름 바다가 보인다.


분화구 부분이다.


다섯 가지의 소인을 찍어주는 후지산 등산 기념 우표


집으로 보낸 후지산 엽서 앞면으로
후지산과 우체국 그림이 있다.

 

*** 참고로 다른 이야기지만,

사과의 종류 중에 후지(부사, 富士)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일본인들이나 다들 이 후지산을 본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후지산이 높이로도 일등이고 유명한 것처럼, 이 품종의 사과도 제일 맛이 뛰어나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전혀 엉뚱하게 이름이 지어졌다. 이 품종은 1958년 일본 사과의 고향인, 아오모리현(靑森縣) 南津輕郡 藤崎町의 원예 시험장에서 발표되었다. 그런데 개발 담당을 맡았던 직원이,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여배우를 흠모해서 그 여배우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우연히 그 이름이 야마모토후지코(山本富士子)였다. 어쩌면 그 배우의 부모가 후지산처럼 유명하기를 바라면서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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