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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하가 있는 부유한 상인의 마을  오미하치만(近江八幡)

  

 

늦가을 어느날 히코네 성을 둘러보고 비와코(琵琶湖)를 따라 서남쪽으로 향했다.    비와코는 시가(滋賀)현의 한가운데 있는 일본 최대의 호수이다.   동서로는 상대편 산들이 멀리 보이기에 그렇게 넓어 보이지는 않지만 남북으로는 수평선이 보일 듯한(?) 꽤 큰 호수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한 일이 비와코를 1개 현에서 몽땅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호수의 물을 관리하는 주체인 시가현(滋賀縣)에서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지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질오염 등 호수의 관리보호에 내탓이니 니탓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와코도 베스(한강의 토착어종을 다 잡아먹는다는 수입 민물고기)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베스의 수입을 조금만 더 신중하게 추진했다면, 일본의 실패를 거울삼아 같은 실수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운하 옆으로 예전 상인들의 창고건물들이 아직도 서있는 하치만호리.


아무튼 옅은 구름으로 상대편이 기슭이 가물가한 비와코를 따라가는 도로옆의 넓은 평야는 어딘지 푸근한 느낌이다.  주위에 산이 없기 때문인지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고나 할까.   오른편은 수평선이 가물가물한 호수,   왼편은 추수가 다 끝난 텅 빈 평야가 펼쳐져 있는 25번 지방도를 따라 언젠가 한번 TV에서 소개가 되었다는 오미하치만(近江八幡)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기후현의 구조하치만이라는 마을도 있듯이 하치만((八幡)이란 이름은 자주 들을 수 있는 지명인데 이름의 유래는 모르겠지만 일본 전국에 하치만구(八幡宮)라는 신사가 3만개가 있다던가!

도중에 농가에서 직접 가꾼 채소들을 파는 길옆 간이가게에서 무도 사고, 고구마도 사고. 볏짚을 태우는 연기냄새를 간간이 맡으며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어느덧 간판들이 보였다.  물의 고향. 물레방아의 고향. 이런 간판들을 지나쳐 편의점 주차장에서 늦은 점심을 때웠다.  어디쯤 볼거리가 있을까 하며 동네를 몇바퀴 돌다가 무슨 마을회관 비슷한 곳의 뒤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부유한 상인의 집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


항상 반복되는 일이지만 “사전에 미리 관광정보를 좀 찾아보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시립자료관 앞에서 마을 관광안내간판을 찾아냈다.  그걸 보고 대충 코스를 정해 돌아다니기로 했다.  깔끔하게 가지치기를 한 소나무가 서있는 전형적인 일본  부잣집들이 늘어서 있는 新町通り에서 예전 부유한 상인(西川)의 집을 들여다 본 후, 하치만호리(八幡堀)로 향했다.  어째 뭔가 있을 듯한 느낌에 해 떨어지기 전에 빨리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치만호리의 운하앞에 도착하자 “잘왔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객 2명을 태운 조그만 유람선이 수로를 따라 유유히 지나치는 운하앞 계단에서 잠시 쉬다가 수로를 따라 내려갔다.  파란하늘과 가을낙엽, 늦은 오후햇살과 물에 비춰진 예전 건물들의 그림자.  거의 달력그림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운하의 끄트머리에 있는 기와박물관을 돌아 하치만 신사쪽으로 돌아오는 길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플래시가 터졌다.   아쉽지만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중에 도대체 어떤 동네였는지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것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경남 밀양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는 이 도시에 대해서 미리 한번쯤 사전조사를 하고 봤다면 좀 더 유익한 여행이 되었을까??   
 

운하에는 아주 가끔씩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지나간다.

운하옆의 창고, 코스모스

달력그림같은 풍경.

운하옆으로는 산책로가 이어진다.


[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코(琵琶湖)의 남쪽 평야지대에 위치한 오미하치만(近江八幡) ]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카 토요토미 히데츠구(秀次)가 1585년 하치만산(八幡山)에 성을 쌓아 올리고, 그 아래에 아즈치성(安土城)의 성시(城下町)를 본 뜬 마을을 세웠다.

마을은 비와코 주변의 늪지대를 매립해 거리형태를 바둑판처럼 정연하게 구획을 나누고, 운하를 파서 무사와 일반백성들의 주거지를 분리하였다.  또한 북쪽에는 장인들의 거리를, 서쪽에는 상인의 거리를 지정하였다. 그리고, 주민의 생활 배수를 흘려보내기 위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하수도인 “背割り”를 설치하였으며, 우물을 파서 솟아나오는 물을 대나무통을 이용하여 생활용수로 사용토록 보내는 등 상하수도 시설을 정비했다고 한다.  

10년뒤 하치만성은 폐성이 되었으나,  마을은 상업도시로써의 발전을 계속하여 에도시대를 통해 유명해진 오미(近江)상인의 본거지를 확립하였다고 한다.  특히 오미상인의 발상지가 된 전장 6km에 달하는 운하 八幡堀는 당시의 기간교통망이었던 비와코(琵琶湖)를 왕래하는 선박을 기항시키는 등 상업도시로서 번영의 기반을  열어준 주요 인프라였다.

 

 

[ 하마쿠라(浜倉) 주변 - 토요토미 히데츠구가 1585년 만든 비와코 수운의 거점 ]

하치만산(八幡山)과 성시와의 사이에 있는 하치만 수로(八幡堀)는,  마을과 비와코를 연결하는 운하로서 오미하치만 상업 발전이 토대가 된 곳이다.   현재는 하치만호리(八幡堀)라고 불리우고 있으나,  옛날에는 이 운하전체를 八幡浦라고 하여  大津, 堅田과 함께 비와코의 3대항의 하나로 꼽혔다.   비와코를 왕래하며 호쿠리쿠(北陸: 후쿠이, 이시카와 등 동해 연안지역)와 關西(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물자를 운반하는 배들이 이 八幡浦에 기항하여 짐을 부렸다고 한다.  지금도 하마쿠라 주변에 남아있는 창고들이 당시의 번영을 말해주고 있다.

운하옆에 세워진 대합실?

유람선이 정박해 있는 곳

 

[ 대표적인 오미상인 니시카와(西川)의 집 ]

비와코 주변의 평야지대인 오미(近江)지역은 농산물이 풍부하고, 육로와 수로의 교통편이 좋아 예전부터 상업이 번성하였다.  오미하치만 성시가 갖추어질 무렵에는 오미 상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져 일본 전국으로 진출해 갔다.

오미상인은 質素儉約, 質實剛健을 신조로, 신용을 제일로 하는 商道를 열어나갔다고 한다. 상인들은 항상 예리한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살아나갈 길을 찾아내어 상업을 영위하였다.   상인들은 상거래에는 인격과 품행이 배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많은 상인가문에는 才覺, 算用, 始末 등 상인정신을 나타내는 가훈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러한 당시의 오미상인들의 성공적인 사업운영의 모습을 지금까지 전해주는 것이 新町 근처의 거리풍경이다.   이곳에는 모기장이나 타타미 등의 행상에서 시작해, 에도(江戶)의 부자 순위에 이름이 실릴 정도의 거상이 된 니시카와(西川)가의 집이 공개되어 있다.   지금은 향토 자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니시카와家의 도코노마

정원

부엌

창고


[ 朝鮮人街道 - 조선통신사가 다니던 길 ]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2년과 1597년,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무모한 조선 침략을 비판하고,  자신은 임진왜란시 병사를 파견한 바 없음을 강조하며 조선과의 국교 회복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607년 조선은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제1차의 사신은 “回答禮使刷還使”라고 하였는데, “回答”이라 이에야스의 국서에 대한 회답이고, “刷還”이란 임진왜란시 납치된 조선사람들을 송환하는 전후처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1636년 이후 이 사절단을 “통신사”라고 칭하고, 1811년까지의 약 200년간에 걸쳐 12회의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서울을 출발해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下關), 세토 나이카이(瀨戶內海)를 경유해 오사카에 상륙.   교토,  오미,  나고야를 거쳐가는 東海道를 통해 에도로 향했다.   조선의 통신사는 외교사절임과 동시에 문화사절이기도 하였다. 관료인 三使(上使, 副使, 從事官) 이외에도 학자, 문인, 서예가, 의사 등도 통신사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총 500명 정도가 사절단을 구성한 경우도 있었다.    “淸道”라고 쓰여진 깃발을 선두로, 피리, 북, 나팔, 징 등을 연주하며, 황금빛 호화찬란한 한복에 금색 자수를 넣은 띠를 차고 행진하는 통신사의 모습은 길가에 군집한 일본인들에게 강렬한 선진문화에 대한 인상을 남겼다.  

新町 근처에서 찾아낸 조선인가도 표식돌

막부의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는 쇄국정책을 엄중하게 시행하여, 다른 나라와의 문호는 굳게 닫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만은 예외로 하여 막부는 조선을 “通信の國” 즉 신의를 갖고 사귀는 나라라고 하였으며, 중국(明,淸)과 네델란드는 무역선의 통행만을 허용한 “ 通商の國”으로 정하였다.

통신사의 파견은 막부를 비롯한 각 번의 환영과 민중들의 열광이 있었던 반면, 문제점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의  대행렬은 왕복 9개월이 소요되는 국가적 대사업으로,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도로 청소 및 다리 수리 등 가도정비와 그 밖에 다양한 준비와 뒤처리 등에 전후 1년은 걸렸다.   따라서 이를 부담해야하는 각 번과 가도 및 숙박지 사람들의 노고와 경비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한다.

여하튼 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막부의 쇼군(將軍) 및 다이묘(大名)들에게는 화려한 외교행사를, 의사, 학자에게는 선진학문에 접할 수 있는 교류의 기회를, 서민들에게는 축제의 날이었다.   

통신사가 파견된 도쿠가와(德川)시대가 역사상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 오미하치만의 인물 - 윌리엄 메렐 보리스 ]

윌리엄 메렐 보리스는 1905년 미국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와, 현립 하치만 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하였으며, 교사를 사직후에도 오미하치만에 머물며 교육이나 의료, 출판, 건축 등 다채로운 사업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하치만 神社의 토리이(신사의 대문)를 통해 바라본 白雲館

白雲館은 1877년 학교건물(八幡東學校)로 건설되었으며, 1994년 해체 수리되어 예전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는 관광 안내소 및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다.   시간이 늦어 보리스가 설계한 건축물은 찾아가 보질 못했으나,  운하중간의 하치만신사앞에 떡하니 세워진 서양식 건물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1941년 일본국적을 취득하였으며, 성은 아내를 따라 一柳로, 이름은 ‘미국에서 와서 머문다(米國から來て留る)’라는 의미로부터 米來留(메레루)로 개명했다.   그러나 그 해 미일 전쟁이 시작되어 일본으로부터는 스파이 대우를 받고,  미국으로부터는 매국노로 비난받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윌리엄·메렐·보리스는 83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일본의 교육과 복지사업에 힘을 쏟고, 건축에도 솜씨를 발휘하였으며, 기독교를 전도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력적으로 활약했다.

“건축물의 품격은 사람의 인격과 같이 외장보다는 그 내용에 있다”라는 신념을 기초로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오사카 신사이바시의 다이마루 백화점, 교토 四條大橋西의 東華采館, 토쿄 駿河台의 山の上호텔 등 일본 전국 각지에 교회, 학교, 병원, 주택 등 약 1,600채에 달했다.  이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약 10% 정도로,  오미하치만 시내에 약 30채 정도 남겨져 있으며,  그의 주거자취가 보리스 기념관으로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운하가 꺽어지며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 있는 기와박물관

 

기와박물관 벽은 하얀칠을 해 깨끗해 보인다.

기와로 만들어놓은 상징물

운하옆 산책로에 초라하게 서있는 지장보살

부자상인 거리의 지장보살은 집을 지어 모셔놓았다.

마을 기념품가게

이마을도 환경미화 잘했다는 상(?)을 받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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