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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시의 남쪽 우지시(宇治市)의 뵤도인(平等院)

 

어느 추운 11월, 교토시 후시미구(京都市 伏見區)를 돌아보고 간 곳은, 조금 더 남쪽에 있는 우지시(宇治市)의 뵤도인(平等院)이다.

이 곳에 대해 별로 아는 것 없이 와서 절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주변의 선물가게 앞에 걸려진 상품을 보니 대충 알겠다....

아이 머리 크기만한 커다란 센베인데 10엔짜리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안의 모양이 이 절이란다.

 

우지시(宇治市)는 교토시와 가까이 있기 때문에 헤이안시대(平安, 794-1185) 초기부터 귀족들의 별장이 많이 지어진 곳이라고 한다.

이 뵤도인(平等院)도 원래 별장으로 지어져 여러 소유주를 거쳐, 후지와라노미치나가(藤原道長)라는 귀족의 "宇治殿" 이라는 별장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사후에 아들인 후지와라노요리미치(藤原賴通)가 1052년에 절로 바꾸었다.

그리고 1053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본존으로 모시는 鳳凰堂을 건립하여 지금까지 이른다.

이 봉황당이 1951년 처음 10엔 주화가 발행되면서부터 뒷그림이 된 것이다.

봉황당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지붕위에 있는 원래의 봉황 조각은 떼어내어 다른 곳에 보관하고, 현재는 모사품이다.

그래도 2004년 11월1일에 발행된 새로운 10,000엔 지폐에 이 봉황 그림이 들어가 있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불교 중에서도 "말법(末法)사상" 이 유행을 하였는데, 염불을 열심히 하여 혼란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來世에서의 행복을 더욱 기원하는 경향이 짙었다. 아미타불은 내세를 말하는 극락정토(極樂淨土)의 부처님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어찌 보면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더 의지 대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경전들과 다른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들이라는 것을 간과한 유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강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경제적 능력이 있는 귀족들이라면 너도나도 자기 가문의 번영을 위한 절을 하나씩 세웠는데

수많은 전란속에 다 없어지고 지금까지 뵤도인만이 살아남았다.

그래서 더욱 귀중한 "古都京都의  文化財" 로 인정되어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까지 되었다.

 

 

 

봉황당의 전면으로 앞에 얕은 연못이 있어 연못 가운데의 섬처럼 보이니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를 표현하였다.

위치상으로 우지가와(宇治川)의 서쪽에 있는 봉황당은 동쪽을 향해 있는데, 건너편의 우지가미진쟈(宇治上神社) 쪽을 바라본다.

처음에는 이렇게 연못 바깥에서 둘러보고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건물로 들어가길래 물어보니

시간을 정해서 견학을 한다고 한다. 또 요금을 내고 들어가니 이런저런 설명을 열심히 해 준다.

 

 

 

봉황당에 들어가니 아미타불이 이렇게 앉아 계시다. 전체 높이는 약 278 cm.

사람들 뒤에 서서 설명을 듣기 보다는 사진을 하나라도 더 찍으려고 애쓰는데, 사진 찍지 말라고 대뜸 혼났다.

국보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이니 못 찍게 하는 것이겠지만,

어렵게 찾아간 불쌍한(?) 중생을 위해서나, 극락정토는 멀리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도 아미타불은 세상으로 나오셔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찍었다.

 

말법 시대라고, 어디 한 군데 마음으로 의지할 곳 없다는 혼돈의 시대라며,

당시의 사람들은 열정적 신념으로 마지막 희망인 휘황찬란한 아미타불을 모셨지만

천년이 지난 지금도 末法세상 같은데, 황금빛도 바래지고, 信心도 쇠퇴하고, 이런저런 제약에 걸려 세상을 응시하는 것도 어려워지는데

아미타불은 무슨 생각으로 계실까 싶다.

 

여러 절들을 다니다 보면 모셔진 부처님들을 보고 돌아서는데 왠지 한 구석 편하지 못한 느낌이다.

"오래 된 시간의 중요성" 으로만 그 최소한의 존재 가치를 어쩔 수 없이 부여받은 고철덩어리가 된 것 같아서이다.

아마 답답한 마음에 크게 외치고 싶어 하실 것 같다.

"나 금빛 아니어도 돼. 내 말 좀 들어 보겠니? 나를 위해 공양하지 않아도 돼. 내가 전하고 싶은 마음을 받아주겠니?

내 모습을 가꾸는 열정으로 내가 얻은 깨달음을 느낄 수 있다면 난 세상에 없어도 좋아"

 

 

봉황당의 위 사진에서 찍히지 않은 왼쪽 부분과, 오른쪽 부분의 측면이다. 이 빨간 다리를 건너서 들어간다.

 

 

 

여기 건물은 봉황당 뒷편에 있는 것인데, 아마도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 같다. 여기서는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이렇게 보기에 그리 커 보이지는 않지만 일본 전통 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찍었다.

왼쪽으로 귀한 분이 들어가는 조금 튀어 나온 정식 현관이 있고, 가운데는 거실과 통하는 곳이고, 오른쪽이 일반 사람이 들락거리는 현관이다.

 

오른쪽 사진은 뵤도인의 봉황당 문양이 들어간 10엔 주화다.

찍고 나서 연도를 보니 平成 8年 이다. 1996년으로 우리가 일본에 처음 간 해이니 기념이 된다.

 

 

주차장에서 뵤도인으로 가는 길 옆에 이런 하천과 다리가 있다.  아마도 예전의 우지바시(宇治橋)를 나타내는 것 같다.

 

 

 

여기가 진짜 우지가와(宇治川)이고, 우지바시(宇治橋)이다. 뵤도인으로 가는 길에서 본 다리로, 뵤도인은 이 다리를 건너지 않은 강변에 있다. 강 건너의 산은 대략 佛德山 자락이고, 우지가미진쟈(宇治上神社)가 있다.

이 다리는 원래 646년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여 "日本三古橋"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보다시피 현재의 다리는 1996년에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단지 예전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난간 아래 부분에 나무로 장식을 했을 뿐이다.

 

참고로 "日本三古橋" 는 위의 우지바시,

시가현(滋賀縣) 오오츠시(大津市)에 있는 세타가와(瀨田川)의 세타노카라하시(瀨田の唐橋),

교토후(京都府) 오오야마자키쵸(大山崎町)과 야와타시(八幡市) 사이를 가로지르는 요도가와(淀川)에 있던 야마자키바시(山崎橋)이다.

말로 써 놓고 보니 명칭 때문에 복잡하게 여겨지는데,

실제로는 이 간사이(關西) 또는 긴키(近畿) 지방의 東에서 西로 흐르는 강을 따라 생긴 다리들이다.

동쪽의 비와코(琵琶湖)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세타가와(瀨田川)가 되고, 다시 우지가와(宇治川)가 되고, 또 다시 요도가와(淀川)로 불리다가 태평양에 접한 오사카만(大阪灣)으로 빠져나간다.

우지바시가 생겨난 무렵에는 이 근처가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으니 다리 하나 놓을 만한 대공사도 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야마자키바시는 없으며, 세타노카라하시는 우지바시처럼 모양이 같은 콘크리트로 1979년 다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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