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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지은 천년사찰  야쿠시지(藥師寺)

 

법륭사에서 나와 다시 지도를 보며 해가 뉘엇뉘엇 기울어가는 오후에 藥師寺(야쿠시지)를 찾아갔다.  넓직한 주차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옆으로는 기찻길이 나 있었고, 나무가 무성한 보도를 따라 조금 걸어 들어가자 藥師寺의 입구가 보였다. 藥師寺는 일반적인 절과는 달리 평평한 평야에 서 있었다. 서기 697년(698년?) 최초로 세워진 이후 현재위치에 이전되었다는 藥師寺.  이후 1300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전쟁과 각종 재해로 하나 둘씩 없어져 가, 현재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은 東탑뿐이라고 한다.

미야다이쿠우(宮大工, 寺 神社 宮殿등만을 전문적으로 짓는 목수)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口傳에 의하면, "伽藍の造營には四神相應の地を選べ"(가람을 지으려면 四神이 상응하는 풍수가 좋은 곳을 고를 것; 여기서 四神은 靑龍, 朱雀, 白虎, 玄武)이라는 말이 전해져 왔다고 한다. 이를 지형으로 풀이하면 東의 靑龍에는 맑은 물이 흘러야 하고, 南의 朱雀은 가람보다 한단계 낮은 곳에 연못이 있어야 하며, 西의 白虎에는 길이 나 있어야 하고, 北의 玄武에는 산 또는 언덕이 가람의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장소를 골라서 북쪽을 배경으로 하고 남쪽을 바라보게끔 사원을 지어야 한다고 한다.

니시오카씨에 의하면 法隆寺는 이러한 네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서 지금도 창건 당시의 7개의 가람이 모두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나, 藥師寺의 경우에는 3개의 조건은 갖추고 있으나 北의 玄武에 해당하는 산이 없어서 결국 東塔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허물어져 없어졌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어쨌든 평평한 평지에 지어진 藥師寺는 꽉 짜여진 느낌이 아니라 어째 좀 황량하고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마치 뒤편에 등을 기대고 앉을 받침대가 없는 의자에 앉은 느낌이라고 할까? 한편으로는 물이 잘 안빠지는 평야지대라 습기가 많아 건물의 나무기둥이 쉽게 썩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른쪽부터 藥師寺의 동탑과 서탑, 금당 (藥師寺 안내문)

 

이전에 야밤에 잠이 오질 않아서 NHK 방송을 틀어보니 흑백필름으로 찍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있었다. 아마 60년대쯤 찍은 교양프로그램 같았는데, 주된 내용은 문화재를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의 문화재에 심취한 미국의 학자가 2차대전이 발발하자 미군에게 요청하여 교토, 나라 등 주요문화재가 산재한 지역은 폭격대상에서 제외토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전쟁중에도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은 문화재들이, 불타버린 法隆寺의 금당처럼 관리소홀로 소실되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다큐멘터리였다. 아마 당시의 일본은, 패전후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 지나고, 어느 정도 재건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문화재 보호에도 신경쓸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시기였던 것 같다.

이 프로그램에 나온 한 장면이 藥師寺였는데 화면은 다 쓰러져 가는 절간의 돌담 옆에서 주지승이 관광객들에게 차와 과자를 내놓고 팔고 있는 장면이었다. 주지승에게 왜 이처럼 훌륭한 문화재 옆에서 관광객들에게 녹차나 팔고 있냐고 물으니, 이렇게라도 해서 건지는 몇푼으로 후세에 길이 보전해야하는 문화유산의 주변 청소라도 할 수 있다는 대답이었다.

 

이러한 시절이 지나고 드디어 藥師寺 재건사업이 시작되었다. 이곳 藥師寺의 재건은 1971년 金堂의 기공식과 함께 시작되어 이후 西塔, 玄奬三藏院의 순으로 하나씩 재건되었으며, 지금도 2003년 완공을 목표로 大講堂의 재건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재건사업의 토오료(棟梁, 대장 목수)로는 니시오카씨가 임명되었다. 이전에는 이 절에도 棟梁이 있었으나, 明治시대 이후 후임을 맡을 사람이 없어 대가 끊겼기에 법륭사의 棟梁인 니시오카씨가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규모의 재건사업을 위한 목재는 더 이상 일본에는 쓸만한 히노키(檜)가 남아있지 않아, 타이완(臺灣)으로부터 수령 2,600년, 가장 어린 나무가 수령 1,000년인 히노키 300 그루를 수입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야쿠시지 입구의 中門,  뒤로 동탑이 보인다.

 

좋은 목재를 고르기 위해 니시오카씨는 "堂塔建立の用材は木を買わず山を買え"(사원건립을 위한 목재는 나무를 보고 사지 말고 산을 보고 살것)라는 口傳의 가르침에 따라 직접 타이완의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골라왔다고 한다.  

이러 이야기들을 책을 통해 전해 듣고 나름대로 기대를 갖고 찾아간 藥師寺. 특히 이곳의 東탑은 '일본미술의 은인'이라고 불리우는 미국인 Ernest Fenollosa (1853-1908)가 "凍れる音樂"(얼어버린 음악?)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1999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도 등록되었다.

완성된 금당

 

藥師寺의 南門을 들어서자 뒤쪽으로는 주황색 칠로 번쩍번쩍 빛나는 건축물이 보였다.  가람내에는 낡은 빛깔의 東탑과 같은 모양으로 깔끔하게 새로 지은 西탑이 서 있었고, 뒤로는 번쩍거리는 금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공사용 천막으로 가려진 大講堂의 건축현장이 있었다.  

가람의 가운데 동서로 세워진 동탑과 서탑은 언뜻 보아도 색깔뿐만 아니라 모양도 좀 다르다. 이는 동탑의 경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고쳐졌기 때문이고, 서탑은 동탑이 세워진 당시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탑과 서탑 --- 3층답으로 원형은 똑같다고 한다. 동탑은 세워진후 1천년이 지나면서 기단이 내려앉고, 벽의 창문도 흙벽으로 하얗게 막아 버렸다고 한다.

 

가람 전체의 분위기는 깨끗했으나 금당의 난간에 바른 주황색 페인트칠과 뒷편의 어수선한 공사현장의 풍경이 좀 눈에 거슬렸다.

공사장 뒷편으로 돌아가자 가건물이 있었고, 여기서는 藥師寺 재건시 사용된 2,500년 되었다는 대만산 히노키 나무의 단면을 전시해 놓고는 니시오카씨의 저서와 사진첩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다시 경내를 가로지르는 좁은 도로를 건너서 뒤쪽의 玄奬三藏院으로 들어갔다. 이곳 역시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듯한 깔끔하게 새로 지어진 건축물이었고, 내부에는 무슨 유명화가의 유화가 잔뜩 전시(平山郁夫화백의 大唐西域벽화) 되어 있었다.

야쿠시지의 재건에 사용된 수령 2,500년의 대만산 히노키.

玄奬三藏院에서 나오는 통로에는 가건물을 세워놓고 이것저것 기념품들을 잔뜩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뭔가 기대했던 것과는 차이가 꽤 많다는 느낌이었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치 플라스틱에 벌겋게 페인트를 칠한 듯한 난간 기둥만이 기억에 남는다고나 할까.

시간이 꽤 지난 어느 날, 참고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가 藥師寺에 대한 나의 기억을 180도 바꿔주는 내용의 글을 만나게 되었다. 福井(후쿠이)의 小倉(오구라)라는 사람이 쓴 내용이었다.
(www.anc-d.fukui-u.ac.jp/~uyo/kitoken/ogura/uso27.html)  
小倉(오구라)씨는 1999년 어느 날 니시오카씨가 棟梁을 지냈던 藥師寺의 大講堂 건축현장을 견학하게 되었는데, 당시 현장의 건설회사 공사사무소장이 자신들이 짓고 있는 건축물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들은 白鳳(하쿠호오: 645-710년, 아스카시대의 후기)시대의 건축물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혜를 짜내서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을 적어도 천년후의 후세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400년후에는 한 번 해체수리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때의 목수들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400년후에는 니시오카 棟梁 이상의 목수가 나타나, 지금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이해하고 수리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法隆寺의 건물이 수많은 목수들에 의해 유지되어 온 것처럼, 藥師寺의 건물도 그렇게 보존되어 갈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사람이 필요한 때가 되면, 니시오카와 같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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