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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햇빛 좋고 조용한 야마다(山田) 온천을 지나며

 

시가고원(志賀高原)의 서남쪽에 있는 笠岳(2076m)의 임도를 지나 야마다목장으로 내려와, 서쪽 고속도로 방향으로 조금 더 가면 있는
여러 온천들을 일컬어 "신슈타카야마온센쿄(信州高山溫泉鄕, 五色,七味, 山田, 奧山田溫泉)"라고 한다.
그 중의 대표가 야마다(山田)온천이며, 이곳에서 1.5Km정도 더 내려가면 "와라비(蕨) 온천(ふれあいの湯)"이 나온다.

좁은 2차선 내리막 길을 따라 가는데 양 옆으로 많지 않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야마다온천이라는 표지판이 보여서 다시 되돌아 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햇살이 눈부시고 조금만 더 있으면 등이 따갑게 여겨질 것 같은 아침부터 우리는 호기심에 바쁘다.
이 작은 마을에는 뭐가 있나 하며 둘러보니 여관들이 의외로 많다. 아직 해발 900m정도의 이 산골에 누가 뭘 보러 여기까지 오나 싶다.
하긴 우리도 이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니 남 흉볼 처지도 아니지만...

마을 가운데쯤에 시커먼 건물이 있어 가보니 "共同浴場大湯"이라고 쓰여있다.
대부분의 온천 마을에는 관광객이 이용도 하긴 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위한 목욕 시설이 하나씩은 있으니 이것도 그렇다.
건물을 보니 모양새는 오래 전 것 같지만 너무 깔끔한 것이 그리 오래된 전통 목욕탕은 아닌 것 같다.


大湯이라고 현판이 있는 윗 부분의 곡선 부분이 카라하후(唐破風)이다.
들어가면 왼쪽이 남탕, 오른쪽이 여탕인데, 건물의 맨 윗부분이 증기가 빠져나가는 곳이기 때문에
각탕이 벽으로 완전히 막혀있지 않다.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일본에서는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하는 것들을 보면 대개가 검은 색이다.
아주 가끔 붉은 색을 칠한 절이나 신사들이 있지만 대부분 검은 색이고, 마을의 전통 가옥을 보전한 곳도 그렇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으로 좀 더 붉은 색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붉은 색이나 검은 색이나 다 옻나무에서 나온 칠(漆)이다.

그 옛날 나무로 지어진 건물의 자연적인 부식 방지를 위해 귀한 漆을 칠했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건물은 몇 군데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서민집들은 비바람에 색이 바래어 잿빛이 되어갔고, 다만 내부에 부엌 연기가 가득해서 검게 그을렸을 것이다.
그러나 재력이 받쳐주는 건물에는 흑칠(黑漆)을 사용하여 어딘가 장중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내부가 아닌 외벽이나 바깥 기둥에 검은 색을 칠한다는 것은 그만큼 귄위와 재력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후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석탄에서 뽑아낸 콜타르(Coal tar)를 선박의 방부, 방수제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본에서도 열차 선로의 침목이나 전신주의 도료로 사용하였다.
이런 획기적인 도료는 나라에서 권장하여 1930년대 정도까지 계속 보급되어 이제는 나무 판자로 만들어진 가옥들의 외벽에도 바를 정도가 되었다.  흑칠보다는 싼 가격에 건물의 부식을 방지하고, 당시 일본인들이 보기에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으니 유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가옥들이 아직도 보전된 곳은 "쿠로카베(黑壁)" 지역이라고 해서 관광지가 되었다.
현재에는 콜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검은 색의 목재용 방부제 페인트를 바르고 있다.

다시 공동 목욕탕을 보면, 솔직히 그 옛날에도 이런 모습으로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이 온천의 역사로는 약 800년 전에 온천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고, 현재의 위치로 물을 끌어와 탕을 만들고 사람들이 찾아오게 한 것이 200년 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연 이런 산골에 온천이 나와도 동네 사람이나 가끔 병을 고치러 오는 몇몇이 들어갈 정도의 대충 지은 움막 정도가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본격적인 설비는 아마도 6-70년대에 관광붐이 일면서 사람들이 찾아오니 여관들이 생기고 마을의 모습들이 좀 정비되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공동 목욕탕도 하나 세우고.

현재 조금 유명한 온천 마을의 대표가 되는 공동목욕탕이나 토쿄(東京)와 그 외 대도시의 몇몇 오래된 센토 건물을 보면, 이 야먀다 온천의 건물과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특히나 입구인 현관이 목욕탕치고는(?) 무척이나 정성스럽게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건축양식은 절이나 신사에서 많이 볼 수 있고, "카라하후(唐破風)"라고도 하며 더 정식으로는 "미야가타(宮型)"라 한다.
카라하후는 원래 지붕의 측면에서 본 맞붙은 곳의 삼각형 부분의 처마를 가리키는데,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 1185-1333)부터 이 부분을 둥글게 곡선을 살렸으며, 이후 모모야마시대(桃山時代, 1573-1600 豊臣秀吉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는 더욱 여러 장식을 달아 화려하게 만들어 격이 높은 절이나 神社, 주요 城의 현관이나 문에 따로 만들어 붙일 정도였다.
그리고 한 참 후인 메이지시대(明治 1868-1912)에는 공공 기관이나 학교, 극장 건물에 장식되었다.

어딘가 신성함과 권위를 상징하는 이런 카라하후가 에도시대의 목욕탕에도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탕이 있는 방의 입구인 "자쿠로구치(?榴口)"의 윗부분에 달렸는데, 아마도 예전부터 사람들이 불교를 통해 극락정토(極樂淨土)에 대한 신앙을 가졌고, 실제로 절에서 정결함을 위해 목욕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던 것과 맞물려, 세상의 더러움을 깨끗이 떨어낼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의미로 만든 것 같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뜨거운 탕에 들어가 기분이 좋아지면 "고쿠라쿠 고쿠라쿠(極樂 極樂)"라고 말한다.

목욕탕 건물의 내부에 있던 카라하후 장식이 언제부터 바깥으로 나왔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동네 목욕탕보다는 온천 관광지의 건물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다. 실제 에히메현에 있는 도고온천(愛媛縣 松山市의 道後溫泉, 日本三古湯의 한 군데)의 본관 건물이 1894년에 지어졌는데 당시의 카라하후 장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후 특히나, 토쿄 지역에서 카라하후가 널리 퍼지게 된 계기는, 1923년의 관동대지진(關東大震災)으로 기존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고 복구를 하면서이다. 여기저기서 새로 집을 지으면서 목수들의 손이 딸리게 되니, 그 전까지는 절이나 신사만 짓던 목수인 "미야다이쿠(宮大工)"들이 일반 집들도 만들었고, 자신의 솜씨를 힘껏 발휘하여 기존의 카라하후를 화려하게 현관 장식으로 사용하여 목욕탕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바꾸었다. 이에 대한 평판이 좋았고, 이후 제2차대전의 패전 복구사업과도 겹쳐서 1960년대 중반까지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에 들어서 각 집마다 목욕탕이 만들어져 공동목욕탕의 쇠퇴가 이어지니 점차 카라하후가 있는 동네 목욕탕은 줄어들었다.

대신 온천 관광지에서 돈을 들여 온천 시설로서의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이런 카라하후를 달은 미야가타 양식으로 짓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 야마다온천도 그렇고, 예전에 갔었던 나가노현의 북쪽 끝에 있는 노자와온천(野澤)의 공동목욕탕인 오오유(大湯)도 이렇게 새로 단장을 하였다.

조금 더 참고를 붙이면,
이런 "미야가타(宮型)"양식은 절, 신사, 공공기관, 극장, 공동목욕탕 외에 또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장례식장에서 운행하는 영구차이다.
일본의 운구차(宮型靈柩車)는 서양식의 검은 자동차를 응용해서, 기본적으로 앞부분이나 운전석, 바퀴가 있는 부분은 자동차 원래의 모습이지만, 뒷좌석이 있어야 할 위치에 조금 길게 뽑아서 작은 절 건물처럼 화려하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검은 색이지만 지붕에는 앞뒤옆으로 금박의 카라하후를 달고, 옆면에도 금박으로 장식을 하고, 심하게는 지붕 위에 번쩍이며 날아가는 용 장식품도 달아 얼핏 보면 이것도 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보면 종교적 신성함과 권력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카라하후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다른 극락(極樂)을 실현하고 있다.


남탕의 입구로, 자판기에서 입장권을 사서 그 옆에 앉아있는 직원에게내고 들어간다.


 조그만 탈의실
 


아담하다고 해야 할까, 작은 탕에는 뜨거운 물이 넘치고
판자벽 너머로는 여탕의 소리가 다 들린다.
안쪽의 플라스틱 바가지가 있는 곳은 몸을 씻도록 하는 일종의 수도 시설인데,
많이 보는 스텐레스 수도꼭지는 없고 물이 나올 네 군데 사각통의 입구를 작은 나무조각이 막고 있다.
윗부분을 살짝 앞으로 당기면 아래 부분이 들어올려져 물이 흐른다.


천장이 이렇게 되어서 각탕의 증기가 위로 올라가 빠져나간다.


야마다 목장으로 내려오는 임도(林道)


다니면서 가끔식 보이는 붉은 소나무가 왠지 우리나라의 어딘가를 기억나게 한다. 그 뒷편 산에는 역시 스기나무이다.


주차장 옆 가지가 늘어져 꽃이 피는 벚나무인 시다레자쿠라(垂?, しだれ?)

*** 공동목욕탕에 대해
 

일본에서 현재의 공동 목욕탕 원조는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목욕 문화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어찌 보면 집에 목욕 시설이 있는 상류계급의 호사였고, 불교의 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신앙에 대한 한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씻을 공간도 없이 한 두칸짜리 좁은 방이 주욱 이어진 에도의 나가야(長屋)에서 사는 일반 서민들이 모여서 목욕을 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경제적인 면이 있어서 집안에 목욕 시설을 갖추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물을 덥히는 과정에서 화재가 일어나 나무 판자로 만들어진 나가야가 타지 않도록 나라에서 금지한 측면도 있다) 

에도시대 초기의 목욕탕은 원래 사우나와 같이 증기만을 쐬는 "후로야(風呂屋, 蒸?浴)"와 뜨거운 물에 몸을 적시는 "유야(湯屋, 湯浴)가 따로 있었다. 그러다가 이 둘이 합쳐진, 탕에 들어가 반신욕만 하며 증기를 많이 쐴 수 있는 "토다나부로(戶棚風呂 벽에 붙은 작은 욕조에 문을 달아 열고 들어가다)"가 생겼다.  
이후 명칭에 있어서 구분이 없어지면서 에도에서는 이런 목욕탕을 "센토(錢湯)" 또는 "유야(湯屋)"라 하고,  교토나 오사카 부근에서는 "후로야(風呂屋)"라 불렀다.  시간이 지나며 이 방식도 불편한 지, 몸을 닦는 방과 욕조(탕)가 있는 있는 방을 더 넓게 구분하고, 탕도 물을 가득 담아 목까지 잠길 수 있는 "스에부로(すえ風呂, 水風呂)"로 변하였다.

그리고 증기가 빠지지 못하도록 탕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윗부분 천장을 아래로 내려 입구를 작게 만드니,  사람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엉거주춤 들어가야만 했다. 이런 입구를 "자쿠로구치(?榴口 석류의 윗부분같은 입구)"라고 해서 대부분의 목욕탕에 만들어졌지만, 빛도 따로 들어가지 않는 어두운 곳이 되었다.
또한 그때까지 남녀가 같이 들어가다 보니 말썽이 생겨, 1791년에는 남녀가 같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예외가 생겨, 결국 1890년이 되어서야 법령으로 混浴을 금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1879년에는 위생적이지 못하다 하여 아예 이런 입구를 만들지 못하게 하니, 지금과 같이 빛이 들어오고 개방적인 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1927년에는 욕조가 있는 곳에 물을 자유로 사용하며 몸을 닦을 수 있도록 수도꼭지와 같은 설비가 만들어졌다.

에도시대부터 시작해서 서민들의 사교장인 공동 목욕탕의 일반적인 내부 구조가 현재와 같은 모습 - 즉, 건물의 입구가 있고, 들어가면 탈의실과 웃고 떠들 수 있는 휴게실, 몸을 닦는 곳, 탕이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목욕탕 건물은 흔히 시대극에서 보는 2층짜리 허름한 목조 "마치야(町家 서민 상인들의 일반적인 집)"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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